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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8일)
제목: "괴롭든, 외롭든 존재는 귀하다"
말씀: 창세기 1:1-3
찬양인도: 쉐키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신성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 목사님()
ㅡㅡㅡㅡㅡ
 
*창세기 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ㅡㅡㅡㅡㅡ
 
​▶연일 지속된 폭우와 폭염을 뚫고 우리를 위해 은혜스럽고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불러주신 우리 하나님께 존귀(尊貴)와 영광(榮光)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은 그 기원이 서양에 있고, 구체적으로는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연유(緣由)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철학자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4가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경우로 생각하면 그 의자를 만든 재료가 되는 나무는 ⓵진료 인, 그리고 니은 자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앉도록 되어있는 형태는 ⓶형상 인, 그리고 진료에서 형상으로 가는 목수의 손길은 ⓷동력 인, 그리고 여러분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은 그것의 ⓸목적 인 이라는 것입니다.
 
*재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
 
결국 재료에서 형상으로 힘이 가는 이유는 그 형상(刑象)의 목적(目的)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주장(主張)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목적을 이뤄야 그 존재의 의미가 있고 목적의 구현(具現)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목적론적 세계관(世界觀)인데, 이후로 서양 사회는 세상이나 존재를 목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러한 목적적인 측면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첫 번째로는, 먼저 부정적인 모습인데 목적이 없는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인생관(人生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창조주(創造主)가 없는 거고, 창조주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는 것이고. 창조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우연(偶然)의 산물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도 결국 이 논리에 의하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 내팽개치신 존재기 때문에 아무런 목적과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게 될까요? 목적과 의미가 없으니까 사람들의 삶은 대개 2가지 극단적(極端的)인 경향으로 흘러갑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들은 심판(審判)도 없고 지옥(地獄)도 없는 것입니다. 심판과 지옥이 없으니까 내세(來世)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로지 지상에서는 죄 승의 조종(操縱)을 받는 욕망에 따라가지고 욕망대로 살게 되겠죠. 결국에는 자기 안에는 욕망(慾望)이 있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런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놀거리, 볼거리, 재미거리들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향락주의,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면서 많은 경우에 소비 중독, 문화 중독, 마약 중독 그리고 퇴폐(頹廢)적인 삶으로 귀결(歸結)될 것입니다. 쾌락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없다고 하는 거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맹목(盲目)성과 삶의 허허로움과 무의미성에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보는 사람은 죽고 나면, 내세도 없고 영원한 세계도 없는 것이니까, 산다는 것이 서글프게 생각이 되고 허무하게 생각되어서 염세적으로 염세주의(厭世主義)적으로 살게가 살 수가 있게 되고 그것의 극단적인 결과는 자살(自殺)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으니까 한 날개는 허무주의, 다른 날개는 쾌락주의의 날갯짓으로 산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과 반대로 의식이 있는 일반인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목적 중심의 삶을 주창을 하고 또 영위를 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의 새들백교회의 닉 워렌이라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쾌락주의와 허무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삶의 길과 방향을 찾는 구도자들의 필요에 맞춰서 맞춤형 저서인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펴내었는데 성경 다음으로, 이것이 전 세계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 흥행을 하자 이어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을 내어서 오늘날도 세상의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것을 도입하여 스터디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복음 중심보다 구도자(求道者)들의 필요중심에 맞춤형으로 다가가기에 아쉬운 점은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가 인생의 목적을 신앙이나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분이 목적을 정하기 전에 우리 장로교회가 흔히 신앙 고백으로 따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도 제1문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냐?’ 아마 저보고 하라면은 이걸 제 1문으로 하지 않고, 사람이 주체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이냐?’ 저보고 하라면 그거 1문을 낼 겁니다. 하여튼, 이 질문에 대한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멋있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약 성경에도 이런 목적 지향적인 언급이 곧장 등장을 합니다. 이를테면,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달음질하고 달음박질한다. 이런 표현이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자 이렇다 보니까 우리 그로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과도하게 목적 중심의 삶을 영위합니다. 이렇게 목적 중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들이 물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어진 생을 무의미하게 살지 않으려면 몸부림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하려고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그 옛날 롯의 아내처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이런 질펀한 허영의 시장에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외골수로 달리는 인생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번은 이런 목적 절대주의, 목적 중심주의를 반성을 해 봐야 됩니다. 먼저 우리의 이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면 여러 문제들이 보입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체와 정신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견제하는 이들은 늘 과도하게 일을 하고 성사 여부를 두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둘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십상이고 그 결과로 가족들의 희생이 수반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는 많은 훌륭한 분들의 인생 고백에서 이미 우리는 많은 경우를 찾고 있습니다.
셋째, 목적에 너무 골문하다 보니까 삶의 여유가 없어져 가지고 늘 바쁘고 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인간미도 없어지고 감성의 문이 닫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들꽃이나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넷째, 목적을 이루면 자기 충족감에 잘난 체할 뿐 아니라 또 자기의 성사된 것을 자기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고 만일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좌절감과 패배의식 속에서 심지어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일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다섯째, 죽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목적을 이루려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도 병들고 몸도 병들고 혹 그러다가 일찍 떠나게 되면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비참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목적 중심주의가 갖고 있는 훨씬 권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웨스민스터 소요리 문답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목적 설정은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많은 경우에 이런 목적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선해 보여도 그것을 해체하여 그 심층으로 흐르고 있는 흐름을 꿰뚫어 보면, 그 안에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의 도도한 흐름이 있음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닉 워렌이라는 목회자가 멋있게 포장(包裝)하는 언어는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여, 그러나 많은 실질적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목적을 세울 때도 그것은 그냥 음표적인 문제고, 그 목적의 민낯은 자기 영광, 자기 출세, 자기 영광, 따지고 보면 인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내 욕망이라는 주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지향적인 삶이나 일을 하게 되면, 목적달성에 혈안(血眼)이 되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학 양식에 맞지 않는 일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갈 수 없는 자리에도 가고 할 수 없는 일도 하고 볼 수 없는 것도 본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까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스스럼없이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물(萬物)의 영장으로서 살도록 이성을 주셨을 때는 촐랑대고 까불대는 우리의 감정을 좀 통제하도록 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제어(制御)함이 없이, 지 맘대로 달아나는 우리의 욕망을 반성(反省)하고 성찰하기 위한 것으로 주신 것인데 욕망의 도구가 돼서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이 이성은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이나 도구로만 활용될 뿐입니다. 이성뿐만 아닙니다. 이런 목적 지향적인 사람들은 주변의 사람들도 자기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하면 그 사람은 이용할려고 하고, 별 도움이 안 되고 존재감이 없는 그저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냉담하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출세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약은 인간들은 대개 이 모양이라 해도 틀림없습니다. 이성이나 사람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기도나 신앙도 자신의 따지고 보면 욕망에 기초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하고, 하나님도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하나님의 영광을 사실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다시금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은 이러한 목적 중심주의 목적 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목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까요? 그럼 우리가 여러분 질문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목적 지향적인 이들에게 그러면 별 목적이 없이 보이는 존재들은 무가치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길가에 강가의 돌들, 들녘의 이름 없는 들풀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먹이를 찾아서 배회하는 유기견들, 들고양이들, 아니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 목적을 찾으려고 해도 평생 찾지 못한 인생들은 무가치한 것입니까?
 
사실 우리 주변에는 목적 없이 사는 분도 많이 있고, 목적을 찾으려 해도 인생을 거의 말년까지 다가가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죽지 못해서 하루하루 연명(連名)하면서 살다시피 하는 힘든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그들의 존재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재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어떤 면에서 목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고대 헬라의 사상가들도 하고 있습니다. 후기 고대에 헬라의 사상가들은 순서를 이렇게 매깁니다.
 
온 조에이 누스, 제가 그리스로 말씀드렸는데 누스, 정신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거 이전에 조에이, 생명이 있어야 되고 또 생명이라는 것은 반드시 온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존재가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 고대 지혜 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오늘 우리 읽은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 본문은 장엄(莊嚴)한 계시의 역사, 하나님 말씀의 민 성경을 여는 첫 문장입니다. 시인들에게도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고들 말하는데, 이 문장은 정말 신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서두입니다.
 
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의 세계에서 유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고. 비존재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가 지금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고도의 기술의 바벨탑을 쌓아 올린 인류는 대단한 기술을 자랑하지만 다 유(有)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지. 무(無)에서 하는 작업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대단한 도예(陶藝)가들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태토와 나무와 무를 가지고 그 대단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지만, 우리의 하나님 창조주(創造主)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우리 하나님은 있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이 있음보다 더 대단한 것이 어디 있으며, 존재보다 더 앞선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지금 우주여행(宇宙旅行)을 꿈꾸기도 합니다. 달나라, 별나라 신기해 보이지만 그곳은 모든 것이 죽어 있습니다. 아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보십시오. 사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대자연, 바다 속의 놀라운 고기들의 세계 하늘에 구름과 새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들 이 모든 존재들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사실 이 존재들을 우리는 매일 겪지만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깨달으면 하루하루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때로는 신비한지 모를 것 우리만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기뻐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있으라는 명령을 하신 그 명령에 따라서 있는 결과가 전개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있음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아직 무슨 일들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목적이 펼쳐지는 일이 전혀 아닌데도 그저 있음 자체만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자연계만 그런 거 아닙니다. 인간도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 하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기쁨은 신약의 탕자(蕩子) 비유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식이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눈이 짓 이겨질 정도로 눈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은 소식이 끊어져 가지고 죽은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소원이 뭐가 있습니까? 그가 돌아와 가지고 가업을 잇고 효도하는 게, 아버지의 소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자식이 객사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요. 설령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딘가 지상에서 살아있는 소식만 하나 들어도 그에게는 감격(感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
 
*누가복음 15장 24절,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신약만 아닙니다. 여러분 구약에 잘 아시는 요셉의 경우 한번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은 22년 동안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22년 남모르는 눈물과 고통 속에 야곱이 살았는데 어느 날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절초풍할 만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뭘 생각했습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게 그렇게 감동스러운 거 아닙니다. 이제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자식 때문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것도 그의 큰 소원 아닙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자식 평생 칼에 묻었던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던 그 자식이, 요셉이 살아있다니 살아있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이제 야곱은 창세기 45장 28절,
 
*창세기 45장 28절,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이스라엘의 가로되 족하도다. 그거는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무슨 예수 믿어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되고, 번영하고 그게 복음이 아니라, 죽었던 인생, 없던 인생, 생겨나고 죽었던 인생 되살아나고 무 존재에서 존재로 다시 드러나는 게, 그게 부활의 복음이고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존재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나 야곱에게 가장 큰 기쁨이듯이, 우리가 이 땅에 생명을 유지하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일을 대단하게 안 하시더라도 우리 하나님께는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 웨스민스터 소요리 제1 문답을 보십시다. 우리가 이 문답을 이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런 대학에 못 들어가면 영광이 가려워지고,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실패하면 영광이 되지 않고 그거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우리의 노력의 결과를 통해서 그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錯覺)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
 
*사도행전 17장 24절,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이요. 영광의 충만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유무가 우리 행위에 달린 것도 아니고, 우리 삶의 결과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럼 무엇에 기뻐하실까 탕자의 비유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이 드러나듯, 잃어버린 한 어린 양을 찾는 것이 목자의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듯,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고, 돌아오고,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 구원받아서 회복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있음, 그 자체를 우리 하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십니다. 존재의 목적은 존재가 있고, 난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설령 존재가 없더라도 모든 존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이 땅에 살면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또 세상에는 의미 없이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있을 건데, 그럼 이들은 가치 없는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청년 자살률이 세계 제1위인데, 젊은이들이 살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서 생을 마감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있는 것만 해도 좋은 것입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향해서 목적을 품어라. 꿈을 지녀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 앞서서 청년들이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여러분이 비틀대고, 쓰러지고, 외롭고, 괴롭다 하더라도, 존재만으로 귀하다. 이걸 가르쳐야 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우스트에서 존재는 의무다 비록 일과성이라 할지라도 비록 순간이라 할지라도,’ 아니 괴테만 그렇습니까? 우리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러분 여기에 우리 예수님의 가치 판단이 나타나는데 천하를 얻는다는 거는 대통령쯤 되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온 천하를 손에 쥐는 겁니다. 인생의 성공의 출세에서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나은 성공과 출세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니가 설령 천하를 얻더라도 니 목숨을 잃으면 니 존재를 상실하면, 그게 뭔 가치냐? 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이 가치 판단에서 우리가 뭘 깨달을 수 있습니까? 목적이 대단한 것 같지만은 존재는 귀한 것이고, 삶에 대한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도 있음만으로 그거는 아름다운 겁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첫째는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야 되겠지만, 과도하게 목적 중심 성취 중심으로 세우지 말고 존재 중심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생 어떠한 세상입니까? 이 도시의 거대한 조직과 질식하듯이 압도하는 분위기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우리를 출세, 경쟁 무한경쟁으로 몰아가고, 우리가 받는 모든 교육은 출세를 위한 조건을 구비하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 혹한에도 울지 않는 이 냉혹한 세대에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시기(猜忌)하고, 경쟁(競爭)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 치열(熾烈)하게 살아가는데 벌써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순수함과 착함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겉으로는 교양과 화려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산다는 것의 재주들로 잘 무장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마저도 그 속에서 호흡하고 그 시대정신에 젖어서 의식 없이 살고 있습니다. 밀란 군대라 소설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욕망적 목적의 무거움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이제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목적의 무거움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치와 무거움을 인식해야 할 것임
 
둘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야곱과 탕자의 아버지의 경우에 보이듯이, 무슨 목적을 이루는 것도 기뻐하시겠지만, 사실은 존재와 생명을 훨씬 더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 예수님도 아침 일찍 나와서 성취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 가지고 조금 일하는 사람을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시는 달란트 비유도 잘 나가지고 5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겨우 한 달란트 남긴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면서 말씀해 보시면 글자 하나 안 틀리게 똑같은 대우를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더 나아가서 이제 우리는 좀더 존재 중심과 생명 중심으로 해야 됩니다. -목적이 이끄는 공동체보다 존재가 귀한 공동체가 더 아름다운 집단입니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보다 존재와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더 귀한 분들이라고요. 그러면 이제 목적을 세우지 말까? 아닙니다. 존재가 중함을 알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이제 말씀의 마무리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논의를 하다 보니까 우리가 깨닫는 깨달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한 영혼의 소중함, 귀함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너무 큰 꿈을 지니고 그렇게 나가면, 가시적인 성취 중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가시적인 결과 중심으로 흐르다 보면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집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내 인생에 별로 목적에 도움이 안 되면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있는데, 내 인생의 목적에 도움이 되든지 안 되든지 똑같이 소중히 여기고 존기 여겨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앞장서 가지고 직분 받아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시고, 헌신하는 분들 당연히 매우 귀한 분들입니다. 그 헌신과 헌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들 직분을 받은 건 아니니까, 혹 직분이 없고 혹 별로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여서 별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분들도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존귀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들녘에 피어 있는 들꽃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시인이십니다. 우리 예수님 뭘 노래했습니까?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들꽃이 하나님께 영광을 대단하게 돌려서 어쩌면 그거 아닙니다. 그 들꽃이 사람들은 몰라주고, 거기에 비바람 다 맞고 거기에 온갖 풍랑과 풍상을 다 막다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꾸준히 서가지고 서 있는 들꽃의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가운데 들꽃 같은 분들 계신다면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병(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뭐 세상 논리처럼 갑(甲)과 을(乙)만 있는 거 아닙니다. 이거는 조직사회서 대표나 책임자가 갑질 한다고 을의 아픔이 물론 있습니다. 그 을의 아픔 때문에 데모도 하고 광화문에 가서 깃발도 드는 분이 있는데, 을의 아픔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그런 시위도 정당성이 많은 경우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갑과 을만 있는 거 아닙니다. 을이라도 될려면, 직장이라도 있고 조직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세상에는 아무런 을도 되지 못한 소위 병(丙)이 있습니다. 노숙자들, 외톨이들, 실직자들, 독거노인들, 환자들, 장애우들, 고립된 자들, 이건 병(丙)입니다. 교회는 뭐하는 단체냐? 병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닮은 사이고 그것이 손양원 목사님, 서서평 선교사가 한 일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약한 교회를 돕고, 힘든 목회자들을 격려하는 한국교회 섬김의 날 매년 하시는데 힘들지만은 정말 잘하시는 겁니다. 교회는 아웃사이드,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민초들을 위한 어쩔 수 없이 승진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표대를 향해서 달리는 것만 아니라, 옆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다시 닉 워렌 목회자의 생명으로 돌아가 봅시다. 영어로 보니까 포포즈 드라이븐(purpose of driven), 목적이 이끄는 데 드라이버, 라고 돼 있다고 저는 드라이버가 고속도로에서 질주하는 것만 생각이 나 가지고 아찔하고 무서운 용어입니다. 이것이 능동태든 수동태든지 간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 사고 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인생이란 늘 그렇게 앞만 드라이브하고 달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시면 창세기도 족장 중심으로 이 게시 역사가 전개되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갑자기 카메라의 앵글이 광야로 확 돌려져 가지고 광야에서 야곱에게 버림받아가지고, 슬피 울면서 목말라서 배고파서 굶어 죽어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그 계시의 카메라 앵글이 비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없이 달리면 옆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항시 개인이나 공동체가 연약한 우리의 이웃들, 연약한 동료들을 돌보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이거는 조선 시대 선비들 했던 겁니다.
⓵경주의 유명한 최 부자, 그분의 소신이 뭡니까? 앞으로 돈을 더 벌어가지고 더 아파트 사놓고 더 땅 투기하고, 더 빌딩 사 놓고, 강남에 그 꿈 안 꿨습니다. ‘100리 안에는 굶는 백성이 없게 하라.’ 나는 충분히 지금 배불리 먹고 사니까 그런 투자를 한 게 아니라 100리 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자.
 
⓶전라도의 구례의 운조루 그 집에 쌀독에는,,, 큰 쌀독에는 한문으로 ‘타인능해(他人능能解)’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퍼가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그 쌀독을 나무 독을 밖에 입구를 두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끼니가 없으면, 그 집에서 무한정으로 퍼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운조루가 오랜 세월 동안 그 지역에 있었던 민란, 동학, 여순 사건, 한국동란, 한국전쟁 겪으면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아무리 악한 이들이라도 집안이 행한 선행을 알기 때문에 그거는 감히 누가 손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목적을 향해서 미친 듯이 드라이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드라이브 덜 하고 좀 느리게 가더라도 우리 주변에 어려운 문제를 돌볼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이웃 사랑의 시각을 지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 출세보다 더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 밖으로 햇빛이 비치고, 새소리만 듣는 것도 감사입니다. 아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이 떠지고, 숨을 쉴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은혜요. 행복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뭐가 감동입니까? 목적 성취가 아니라 존재가 지속하는 겁니다.
 
여러분, 따라서 진학하시고 취업하시고, 승진하시고, 당선되시고, 결혼하시고, 자녀 놓으시고, 그런 일에 대해서도 특별감사헌금을 당연히 하셔야 되고, 거기에 더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깜빡 잊으시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운 망각 증에 따른 생존 감사헌금을 매주 매일 모아가지고, 드리셔야 그게 수준 높은 신앙이라고요.
 
여러분, 앞으로 사랑의 교회 헌금을 지켜보겠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인생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인물들 한번 보십시오. 누가 목적이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믿음의 조상이 되려는 목적을 언제 품었습니까? 모세가 한사코 발뺌을 했지, 언제 출애굽의 영도자가 될 계획을 언제 꾸었습니까? 다윗이 양이나 치고 노래나 좋아해서 불렀지, 언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고, 그것도 성군이 될 목적을 언제 세웠습니까? 신약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요한이 갈릴리 바다에서 그냥 고기나 잡고 살 인생이라 생각했지, 언제 비교가 안 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서 어부가 살아남은 어부가 될 목적을 언제 꿈꾸었으며, 언제 성경 기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오는 세대의 믿음의 사표가 될 꿈을 언제 꾸었습니까? 성게의 어떤 인물이 목적을 설정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대로 인생의 어떤 삶의 한 순간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부르신 한 번 듣고,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존재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결론을 내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국을 갑니다. 그 천국이 어떤 세상인지 요한계시록 22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오, 둘째는 남보석이오.”, 등등,,, 여러분 천국은 우주 최고의 주얼리(Jewelry) 상점입니다. 혹시 보석을 연구하시는 분들은 게시로 22장을 좀 잘 연구하시고, 보석상을 하시는 분들은 천국보석상, 아마 이러면 많이 모여들 겁니다. 저는 여러분 천국이 보석천국인 거 관심 없습니다. 천국에 어디에 관심 있느냐, 이 보석의 세계라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고요. 제가 그래서 하는 이 낙은 인생은 늘 무 존재 위협, 늘 비존재의 불안 속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그것에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시민들인데 우리가 가는 그 세계는 시들고, 병들고, 늙어가는, 죽어가는 세월의 무자비한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나 목적을 찾으면 좋을 거지요. 그러나 혹시 삶의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무가치한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의미 없는 삶이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것도 대단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내게 많은 복을 주시지 않아도, 숨쉬게 하는 것만도 은혜요. 형언하기 어려운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나그네 길이 괴롭든, 외롭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흔들리지 마시고 나그네 길을 아름답게 걸어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한다. 우리들이 숨 쉬고 있는 거, 살아가는 거, 다 하나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며, 세상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불평 불만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하고 담담하게 살며, 특별히 부르심이 있을 때 그 부르심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길이 되어야 한다. 있음으로 가치 있는 존재​, 있음만으로도 아름다운 것,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아서, 들꽃도 그자체가 아름다운 것처럼,​ 갑(甲)을(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丙)에도 신경 써야한다. 노숙자, 실직자, 독거노인., 아웃사이더들을 돌보는 사역이 소중하며, 옆을 보는 여유와 삶이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삶이어야 한다. 질주하는 삶은 아님을 기억하여 항상 그 존재만으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임을 알아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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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1일)
제목: “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1,2부), “은혜 속으로”(3,4부)
말씀: 에스겔 48:35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이선복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학진 목사님(1,2부-“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
-윤대혁 목사님(3,4부-“은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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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8:35,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베드로후서 1:2-4,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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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진 목사님(1,2부-“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저에게 사랑의 교회는 마음의 영적 고향 갈릴리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오면 마음의 위로가 있고, 포근한 사랑과 격려가 있는 친정집과도 같습니다. 제가 200년부터 2009년까지 이곳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었던 시간은 저게 가장 큰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다. 라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이는 너무나 큰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이 귀한 강단을 허락해 주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교회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저는 제가 섬기고 있는 뉴욕 장르교회에서 벌써 7년차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배려를 해주셔서 2개월 좀 넘는 시간을 안식월로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잠시 한국에 나오게 됐습니다.
 
하나님 이 기간 동안에 혹 하나님께서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을 주신다면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주신 감동의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이 에스겔서가 가장 마지막 절 말씀이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지난 2~3개월 동안 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그 약속의 말씀이었거든요. 바라기는 오늘 전하는 저나, 듣는 우리 서울 사랑에게 모든 성도님들, 제가 받았던 하늘의 위로와 그 평안보다 더 큰 은혜를 받는 이 시간 그리고 돌아가신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언제가 가장 힘드세요? 언제가 가장 힘든 시간이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임재성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는 그런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데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죠. 과연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가? 라고 하는 에 그 정도로 참 아린 가슴, 아픈 가슴, 긴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그런 시간이 가장 힘든 시간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힘들어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별로 나와 힘든 것과 연결시키지 않죠. 그렇지만은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부분이 정말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로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믿죠. 그런데 왜? 그런데 내게 왜? 또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간들이 주어지는 것일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저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등등, 이런 시간들이 실질적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참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실은 에스겔서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이러한 아린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通察)력이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믿음의 에스겔의 신앙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결론이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질문들이 주안에서 평안함으로 해결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은 이런 말씀 아닙니까?
 
*에스겔 48:35,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이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운 우리 현대인 성경 버전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전체 둘레는 약9.5킬로미터이다. 사람들은 그 성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이라 부를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에스겔서는 전체 48장이나 되는 예언서(豫言書)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 아까 말씀드린 거와 같이 가장 마지막 절 말씀이고 결론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말씀은 긴 그의 눈물에 신앙의 여정(旅程)을 결론짓는 그리고 결론으로 신앙 고백,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귀하신 그 이름을 기록하면서 에스겔서를 마무리합니다. ‘여호와 삼마’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이름이죠. 여러분 ‘삼마’라고 하는 이 뜻은 영어로 말하면 데얼(There), ‘그곳’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삼마는 그곳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한다면,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이 임재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것이죠.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어 제목을 다룬 곳입니다. 여러분 이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에스겔서를 기록하고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 그의 신앙의 고백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에 대한 무게라고 할까요?
 
그 무게를 우리가 좀 더 알려면은 이 에스겔 선지자라고 하는 개인에 대한 뒷배경, 그거 어떠한 역사 어떤 배경 가운데에 있었는가, 또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좀 알 때에 에 좀 더 우리가 아 이 말씀의 은혜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자 성경은 실은 이 에스겔이라고 하는 개인에 대해서 많이 기록돼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에스겔서, 여러분 처음 등장하는 1장 첫 구절인 1절부터 3절까지를 보게 되면은, 어느 정도 아 이런 시기에 에스겔 선지자가 존재했고, 아 이런 일을 그가 당했고, 아 그는 이러한 개인적인 뒤 배경에서 자라났구나, 아 그래서 이러이러한 사명과 소명이 있었던 자였구나,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자 우리 그러면은 에스겔서 우리 1장으로 한번 돌아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1절에 보니깐,
 
*에스겔 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서른째 해, 넷째, 딸 초닷새해라고 시작을 합니다. 자 여기서 30째 해라고 하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에요. 나이, 에이즈 오브 더 리브(Age of the live) 그러니까는 그가 30세 되던 해에, 이렇게 여러분께서 이해하시면 쉽겠습니다. 그가 머물었던 곳입니다. 내가 ‘그 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발 강가는 바벨론 어느 한 외지에 있는 강의 이름입니다.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그러니까 너무나 쉽죠.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어 그발 강가라고 하는 그곳에 이렇게 거하게 된 노예(奴隸)로 거하게 된 그때를 말하는 그의 나이가 그때 30세였다. 이렇게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조금 더 역사적인 배경을 2절에 말씀합니다.
 
*에스겔 1:2,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유다 왕의 이름이죠. 여호와 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 그달 처닷새라. 여호와긴 왕이 정확하게 BC 597년에 에스겔과 많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에 의해 가지고 포로로 잡혀가서 그 발 강가로 끌려가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와긴 왕이 잡혀서 함께 당신도 이 그발 강가로 노예로 끌려온 지 5년이 지난 해였다. 5년의 지난해였다. 그러니까 그가 25살 정도에 포로로 잡혀 와서, 5년 정도 그곳에 지내면서 30세가 되던 해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그러는 것이죠.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나님의 놀라운 살아있는 말씀이 하늘이 열리면서, 그에게 소명과 사명과 비전과 예언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자 3절을 보게 되면,
 
*에스겔 1:3,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그의 뒤 배경에 대해서 어떻게 자라난 패밀리 백 그라운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대아 땅 그 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그러니까 제사장 가정 레위 지파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 부시라고 하는 분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이 당시 비슷한 연대였죠. 이 남유다 이스라엘 가운데 미래가 촉망이 되는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어요. 다니엘은 에스겔과 받은 소명과 사명의 결이 좀 다릅니다. 둘 다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말 귀한 믿음의 청년들이었지만 다니엘은 제사상 쪽이 아니죠. 다니엘은 신앙이 정말 좋았지마는 다니엘은 정치가 쪽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아주 탁월한 평신도로서 이 정치 계열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애하는 그러한 능력 있고 탁월한 자였었어요. 에 그래서 그는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 왕궁 쪽으로 아 그가 인제 잡혀가게 되고 이 에스겔은 이제 제사장 결이에요. 그러니까는 미래의 촉망이 되는 청년이었는데, 이 사람은 우리말로 말하면, 미래의 좋은 목사 감이에요. 저 목사감, 그러니까 이 교회와 세상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볼 때에 이렇게 참 촉망(囑望)이 되는 기대가 되는 그러한 청년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 에스겔이에요.
 
우리는 다니엘 하면은 워낙 다니엘 12장을 통해서 주일학교 잘 다니신 분들이라면 얼마나 스펙티컬하고 자꾸 용어가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스펙테컬하고, 이 표현이 이것밖에 안 돼요. 제가 예 얼마나 우리 에피컬한 그런 스토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다니엘 하면은 아 이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다니엘이 어떤 인물인 것을 알지만은 에스겔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적어도 우리가 이 정도만 보더라도 에스겔이 참 귀한 청년이었구나, 미래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중요해요. 이런 모든 영적 일에 참 준비된 자였구나,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죠.
 
민수기 4장에 보게 되면, 레위지파에서 자라난 제사장 가정에 자라난 자녀들, 특별히 아들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제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하는 이 성전에서 봉사한 모든 일들을 보고 배웁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해서, 그런 어떤 영적인 그런 가문 가운데에 레기스가 있어요. 그 에스겔도 어렸을 때부터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그 성전 가운데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아버지와 같이, 할아버지와 같이, 거룩한 의복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겠구나, 이것이 내가 받은 소명이고 사명이구나, 그런 떨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가슴, 어떻게 보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어렸을 때부터 잘 자랐을 거예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격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보면서 아 이런, 이런 부분들은 하나님 앞에 내가 더 정결하게 나아가야 되겠구나. 그리고 이 민수기 4장에 또 보게 되면은 25살이 될 때부터 우리말로 말하면 전도사가 될 수가 있어요. 거룩한 의복을 입고, 정으로서는 아니지만, 부로소 성전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면은 이제는 정식으로 정이 되어서 제사장 모든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된 자로 사역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목사가 되는 것이죠. 당연히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이제 25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내가 사역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그 기대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그의 순수하고 맑은 거룩한 그의 눈빛 눈에서 보여주는 사건들은 그렇게 영광스러웠던 솔로몬의 전이 불에 타고, 거룩한 괴물들이 짐승과 같은 저 바빌론의 고악스러운 손길에 의해서 다 빼앗기고, 허리 큰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이런 비참한 일들을 에스겔 순수한 그 25살에 목도(目睹)하게 된 거예요. 현실은 여호와긴 왕과 함께 잡혀서 그 발 강가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4년, 5년 서러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죠. 그 당시 여러분 이 시편 137편 1절과 몇 구절을 보게 되면은 참 우리가 아 좀 이렇겠구나, 서럽겠구나. 라고 하는 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죠.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때 그 당시에 상황의 모습이며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노래를 청하며, 우릴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라.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야 너희들 히브리 찬송가 있잖아. 18번 불러봐 당신들의 기쁨을 위해서 술에 만취가 되어, 농락하는 그 어조로 자신들의 기쁨을 위하여 찬성을 부르래요.
 
저와 여러분이 그 상황 속에 누워 있었다면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래서 4절에 보니깐 우리가 이방 땅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좀 아르덴티파이(Identityify)가 되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에스겔에게 귀한 말씀으로 함께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는 에스겔의 마음 깊은 곳에 아린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가? 5년 전 트라우마와 같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든 눈을 감을 때마다 나임 미호와 같이 계속 나타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일들 가운데에,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과연 그곳에 계셨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 분명히 나를 사랑하사 집합 가운데 태어나게 해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소명을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성전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다 앗아 가버린 그 사건을 놓고 과연 하나님은 그때 그곳에 계셨는가? 질문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가? 도대체 나에게는 어떠한 영적 존재 가치가 한 가닥이라도 남아있는가? 나는 뭐 하면서 사는 것이지, 뭘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이지. 여러분 좀 느껴지나요? 저는 이 말씀 북상하면서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권능의 말씀으로 ‘나 살아있다.’ 약속에 미래에 영광스러운 회복의 비전에 계시의 말씀을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여러 환상들 예언의 말씀들이 있지만 때로는 왜 심판을 받아야 되는지, 다 사랑의 음성이죠.
 
특별히 그가 보았던 이 환상 중에 분명한 귀한 환상은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는 것이죠. 그리고 성전 이 무너진 성전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전으로 회복이 되는 그 놀라운 비전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 두 손을 다 늘어뜨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누워 있고 자빠져 있고 아무 힘도 발휘 못하는 과연 저들이 살겠는가, 인자야 저들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하늘의 생기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 속에 불어 들어가죠. 힘을 얻고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는 환상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 성전 가운데에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와 같은 그 물들이 범람(汎濫)하고 범람해서 47장에 나오죠. 발목에 찼다가 무릎에 찼다가 허리에 찼다가 도저히 헤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이것이 성전 밖으로 흘러가서 가는 흘러가는 곳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흘러가는 곳곳마다 열매를 맺고 흘러가는 곳곳마다, 가는 곳곳마다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나는 놀라운 이 회복의 영광을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일이 이루어졌을까요? 안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졌죠. 누가 오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갈 천국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물론 구원을 통해서 죽음은 천국까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에서 말쿠트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바슐레라고 하는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으로,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삶에 왕이 되어 주시고 주인이 되시므로 말미암아 내 삶 자체가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미 천국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그래서 이 구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놓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뭐라구요?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왜 임마누엘이라고 할까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약속에 성취,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실체고, 보고 만지고 듣고 우리의 모든 아픔, 고난, 배고픔, 육신의 질병,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억울함, 거절감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홀로 다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죠. 파라클라이토스 파라 곁에 내재하셨어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시는 그 성령님이 위로자가 되어 주시고,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상담가가 되어 주시고, 흔들릴 때마다 능력이 되어 주셔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 함께한다. 함께함을 증거 해주고 함께함이 실체가 되도록 성령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내 교회를 세워오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가 없는 물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순교를 통해서도 죽을 수가 있고, 암에 걸려서 우리가 일찍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절대로 뺏어갈 수가 없는 그러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신앙이 저와 여러분의 어떤 상황 가운데서 결론이 되는 믿음의 고백 신앙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때, 그때도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안면해주십시오. 현실은 어때요? 절대로 쉽지가 않죠. 예 우리 다 믿지만 현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1984년도에 전도사가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캠퍼스 사역하고 열심히 달려와서 달려와서 달려와서 올해가 몇 년도죠 2024년인가 몇 년 됐습니까? 40년이 됐어요.
 
저도 나름 주의 종으로 헌신해서 40년 됐어요. 살기 점점 갈수록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떻게 이렇게 잘하세요.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에 감당하라고, 감당하라고 감당을 주시는 십자가 더 무겁구나, 무겁구나 하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아무튼 40년 동안 달려오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죠. 더군다나 서울 사랑의 교회의 10년 정도 사역하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을 만났고, 저의 전도사 사역부터 우리 학생들 지금은 다 어른들이 되고, 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 뒷문으로 들어가면 기가 막힌 기도 제목이 없는 가정에 단 한 가정도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이에요. 뭐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저도 오늘 예배 바로 오기 전에 너무나 들으면 안 되는 소식을 또 가정 가운데 들어서 걱정하더라고. 설교하는 데 지장이 될까 봐,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현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현실은 쉽지 않겠지만, 이 신앙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의 결론이 되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입니다.
 
1956년이요. 미국 전역, 특별히 시카고가 가장 핫 이슈가 되었죠. 미국 전역에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아주 신실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준비된 청년이었죠. 그와 그의 베스트 프렌즈, 하나님의 나라에 100프로 헌신을 하고 이 4명이 전체 5명이 에콰도르라고 하는 여러분 잘 아시죠? 이 내용 아오카 족속에게 미전도 족속에게 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준비를 하고, 기도로 그리고 그들에게 나아갔던 자들이었어요. 이미 잘 하시는 대로 그들의 경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에 의해 가지고 비참하게 창에 찔려 단 한 마디도, 단 한 번도, 한순간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창에 찔려 여기저기 5명의 전체 다 죽게 된, 이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언네세서리 웨이스트다.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비아냥 하고, 시카고 이 뉴스 페이퍼 헤드라인에는 그렇게 저희들의 무모한 선교를 비판하는 기사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 의심하게 된 것이죠.
 
그럴 만한 것이 다른 친구들도 너무나 탁월한 친구들이었지만, 특별히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이 친구는 재능도 많고, 은사도 많고, 탁월한 친구들이었어요. 아 짐 앨리엇 친구는 위튼 명문대학에서 수석으로 공부를 했었고, 또 수석으로 졸업한 친구였어요. 탁월한 연설가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런 청년이었어요. 그가 연설을 하면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빌리그레함을 능가하는 최고의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러니까 정신적으로도 육신적으로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레슬링 스포츠가 굉장히 어렵거든요. 레슬링, 강인한 사람이어야지만 감당하는데 이 디비전 챔피언까지 갔던 친구였어요. 레슬링으로서, 얼마나 참 감동 있게 글을 잘 썼는지, 지금도 그가 쓴 글들이 이 파블릿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 도대체 젊은 이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깊은 영성을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수 있을까? 그의 저널을 보고 다들 놀래요. 이랬던 짐 엘리엇, 미래가 촉망이 되는 짐 앨리엇, 그리고 그의 4명의 친구들 단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저희들이 비참하게 죽어난 것이고. 그러니깐 언 내세서리 웨이스트다 그 5명의 얼굴을 한번 보시겠어요. 제가 사진 카톡을 준비했는데 나오죠? 예 라지얼 유 더 리온 페이트 플레이미 가운데 짐 엘리엇, 네이트 세인트 또 네이트 세인트 간증했어요. 나중에 애드 맥컬리 다 훌륭한 친구들 인상들 좋죠? 예 저 5명이었습니다. 내려주시죠. 그들은 총들이 있었어요. 죽는 순간에까지도 단 한 명도 총을 잡고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반항하지도 않고 죽어나간 것이에요. 근데 가장 좀 힘들었던 부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해석하느냐에 있었어요.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을 품었으며, 어떤 의문이요. 네, ‘여호와 삼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셨는가? 계셨더라면 또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저희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비참하게 단 한순간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가도록 무능하게 내버려 둘 수가 있는가? 이 여호와 삼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었어요. 그리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믿어봤자 소용없어. 저런 무능한 하나님이라면 믿어 봤자 소용없어. 나가 내가 힘들어하는 거와 상관없는 하나님이야. 이러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정황을 놓고 남편이 창에 찔려서 고통 가운데에 죽어갔던 그 아픔보다 더 가슴을 도려내듯 아파하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라고 하는 신앙이 좋은 아내였어요. 그에게는 한 살 난 딸이 있었어요. 원어 웨이스트, 네세서리 웨이스트, 여호와 삼마 하나님,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여인이 이렇게 그대로 기사화합니다. 통역 번역한다면은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라며 말씀을 삼가십시오. 낭비라니요.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엔 너무나 귀한 신학적이고도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이 말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 그 책임을 수행하고 생애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이에요.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썩어 없어지는 긴 인생이 아니라, 짧더라도 닳아 없어지는 그 인생을 담아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성령의 감동으로 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간호사 훈련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오카 부족에게 가기 위한 것이었어요. 네이트 세인트, 아내와 친척들 누이 뭐 이렇게 다 갈 수 있는 사람들 모아서 그 아오카 부족으로 이 여인들이 들어갑니다. 2년 후에 들어갑니다. 다행히 아오카 부족은 남자를 죽이지,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부족이었습니다. 정성껏, 정성껏, 남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사랑 복음 십자가의 희생과 정신을 가지고 저희들을 정성껏 돌보고 섬깁니다. 그렇게 5년을 섬기죠. 그리고 이제 일단 미국으로 나오게 되는 그 순간 추장이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당신들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와서 지난 5년 동안 이렇게 희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그때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말을 합니다. ‘저희는 5년 전에 이 강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5명의 미국 사람들의 아내, 남편이 전하기 원했던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섬김으로 한 것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추장의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저도 그 미전도 종족에서 추장 이런 비슷한 복음을 전하고 그랬었는데요. 성령의 감동 준비된 추장은 하나님의 때,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추장이 예수님 영접 세례 받으면 모든 부족 사람들이 받아야 돼요. 오인가 뭔가 안 받으면 죽어 그러면 죽어요. 예, 그러면 다들 겁나서 다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아 할렐루야!!~ 그다음에 역사들이 일어났는데 비슷한 케이스가 일어난 것이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그때부터 하기 시작하는데, 잘 알죠?짐 엘리엇과 친구들을 죽였던 5명의 아오카 부족 사람들, 4명이 목사가 되고, 한 명의 전도자가 되죠.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특별히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샘이죠. 샘 세인트 한번 사진을 보여주시죠. 지금 저기에 나오는 이 민카이라고 하는 아오카 목사예요. 저분은 누구냐 바로 이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이거든요. 저분이 샘 사무엘 세인트인데 그 스티브죠 스티브 세인트의 아버지인 네이트 세인트를 죽인 사람이에요. 죽인 사람이 저렇게 목사가 돼서 나중에 아들도 그곳에 자랄 때의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동생인 이 캣디도 강가에서 세례를 베푸는 너무나 훌륭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내려주시죠.
 
엘리자벳 엘리엇도 책을 잘 썼죠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라고 하는 이 책자가 있습니다. 식스 체프트로 돼있는 책잔데, 제 아내가 지난 4개월 전부터 이 책을 붙들고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어요. 저도 함께 읽었어요. 그리고 저희들은 인제 북클럽 그래 가지고 신앙 서적 읽기, 나이 드신 권사님도 상관없이 인생이 힘드신 분들 같이 함께 이 책부터 매주 읽으면서 울음바다가 되고, 큰 은혜가 임했어요. 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고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썼고, 이 여인의 삶은 계속해서 어려운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보게 되면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기록을 했어요. 라틴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은 라틴어에서 CRUX, 라고 하는 이 단어가 핵심이라는 단어이고, 이것이 곧 플러스 CROSS, 십자가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고통에 대한 질문의 십자가 위에서만 우리는 고통과 사랑의 모순을 녹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절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계속 파도와 같이 밀려올 때에 이 여인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삶이 영원하신 팔에 안겨 있다고 믿든가, 우연에 달려 있다고 믿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간 지점은 없다.’ 이것은 팀 켈론 목사님의 고통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말씀하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그분도 고통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거나, 고통은 또 멀어지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라고 하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이 에스겔의 삶 가운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강하게 하고, 결국 끝에 모든 트라우마, 모든 아픈 고통을 위해서 결국은 의심치 않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결론을 낼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고, 미래의 영광이 이미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를 가지고 오신 예수 안에서 그분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고, 통치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 삼마 하나님, 나와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힘을 얻고 미래의 영광이 지금의 나에게 힘과 평안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말씀을 이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실은 한 3~4개월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목회 적으로 힘든 것은 얘기를 안 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제가 개인적으로 힘든 이야기를 뉴욕 장로교에서 여러분 나 너무 이렇게 말하는 목사는 미성숙한 목사죠. 절대로 제 자존심이 목사라고는 자존심 허락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래요. 힘든 성도들 이런저런 어려움 있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 줘야죠. 목사는 힘든 척 해서도 안 되고, 힘들어서도 안 되지만 힘들면 어떡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친정집이잖아요. 여기가 예 친정이니까. 에 말을 좀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치만 뭐 개인적인 왜 힘들었고, 정말 힘들었어요. 구체적인 말씀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정말 힘들었어요. 쉽게 말씀드린다면 프라우드 그 스캠 당해 가지고 보이스피싱을 좀 아니 은행에 다 털렸어요. 예 놀라지 마세요. 얼마 없어요. 예 그렇지만 다 털렸어요. 얼마 없는 사람이 털린 거 되게 아픕니다.
 

♣요약

그것은 그것과 같이 평화의 터라는 의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우지 않고 원래의 의미인 `여호와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로 불리 우고 있다. 이것은 다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포로들은 돌아온 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고, 자기들 중에 거하신다는 확실한 증표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 교회도 이와 같이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데, 이전에 임재 하시던 것처럼 쉐키나로서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때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떤 영혼이라도 그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의 원칙을 갖고 있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고 하시니,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늘의 영광과 축복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는 곧 과거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 오셔서 함께 교제하시며 거룩한 친교를 나누심에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1일)
제목: “은혜 속으로”(3,4부)
말씀:*베드로후서 1:2-4,
사회: 유선비 부목사님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3,4부-“은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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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2-4,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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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시길 믿습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들 가운데 우리가 100%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 우리는 한 결 같이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99년도에 처음 노트북을 구입을 했는데 그때 노트북의 하드 용량이 4GB였습니다. 지금은 2테라바이트(Tera byte), 그때 얘기하면 200배가 더 넘는 2테라바이트(Tera byte)의 용량을 갖고 있는데, 특별히 영상이나 이런 걸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순수한 작업이라면 그 노트북의 역량을 채울 사람도 없는 게 일반적인 거죠. 그래서 노트북 처음 샀을 때 4기가를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노트북을 샀던 경험이 있는데요. 우리가 갖고 다니는 태블릿이나 또 전화기 역시도 우리가 만든 사람 역시도 그 기능을 다 알지 못해서 나오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내가 만든 이 기계가 이런 능력과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만든 일마저도 역량과 한계를 측정하지 못한 애들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이런 질문을 한번 해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와 같이 잘 활용하고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여러분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그 은혜를 누려야 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은혜가 마치 우리의 삶의 과거가 되어서 그래 옛날에 예전에 좋았었지, 그때는 참 운해가 넘쳤었어. 라는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 그 신앙은 언제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위기의 신앙에 빠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는 날마다 순만하게 날마다 풍성하게 누려야 되는 은혜가 돼야 될 줄 믿습니다. 왜 그러하냐면 그것은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2전 8절에는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뭐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가 받은 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니 선물을 주고 나서 그 선물을 뭐 잘 썼니, 안 썼니. 이렇게 따져 묻는 건 너무나 속이 좁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만약에 그 선물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바꿔서 준 거라면 그의 생명과 바꾸어서 나에게 준 선물이라면 그 선물을 쓰지도 않고 저 구석에 처박아 놓는다 반면, 그 준 사람의 마음은 결코 기쁘지 않을 겁니다. 아마 많이 속상할 거예요.

제가 중학교 중등부 사학을 처음 시작을 할 때, 그때 중등부 선생님들이 제가 생일이라고 넥타이 선물을 하나 해 주었습니다. 그 선물을 담당했던 총무 집사님은 패션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옷을 입어도 대체 저 옷은 어디서 구입해서 입으신 거야. 나눌 정도로 화려한 옷이었고, 화장과 헤어스타일 역시도 80년대 미스코리아를 연상하는 그런 화장법과 그런 헤어스타일을 가진 정말 패션의 선두주자 같은 분이었는데요. 그분이 고른 넥타이다. 보니 24살 된 청각 또 학생 전도사에게는 그 넥타이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칼라였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단벌의 양복 가지고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넥타이였고, 그 넥타이에 맞춘다고 해서 양복을 새로 살 수도 없고, 제가 그때 용기를 내서도 했었어야 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못해서 그 넥타이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선생님들과 그 총무지사님이 저를 보는 눈빛이 좀 이상한 겁니다. 저를 볼 때마다 계속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어요. 넥타이, 넥타이, 이런 느낌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용기를 내서 했었어야 되는데 차마 하지 못해서 그때 아마 했었다면 아마 새로운 패션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선물은 이와 같은 거죠.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 여러분 감사합니다. 라는 말도 좋지만 그와 함께 그 선물을 잘 쓰고 잘 활용한다면, 준 사람이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 선물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쓰지도 않고 저 구석에 처박아 놓고 받았는지 안 맞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 준 사람의 마음이 약간 속상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 계신 선물도 이와 같은 겁니다. 이와 같은 거 그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거고, 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과거의 기억이 되어서 언제 그네가 있었어. 라고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죠. 요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위에 계신 은혜의 선물은 어떤 은혜이고 어떤 선물일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은 우리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전서 15:10,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를 2가지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뒀던 사람이고 그를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제면시키기 위해서 나의 모든 젊음을 내 모든 면적을 다 쏟아 부었던 사람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은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말하고 있는 은혜는 그런데 내가 사도를 부름 받아 삶을 할 때 많은 죽음의 위기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너는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이잖아!’ 누가 무슨 하나의 말씀을 가르쳐! 온갖 모함과 온갖 많은 어려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사도로써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내 노력과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이거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가 된 것이다. 라는 그 2가지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는 사돈마을만의 은혜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죠. 내 힘과 내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그 모든 가정도, 내가 지금 두 발로 서 있고, 오늘 이 시간까지 온 것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도저히 오지 않았고.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의 모든 것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들의 고백일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는 단번에 1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죠. 여러분께서 베드로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의 말씀에,

*베드로전서 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에게 더욱 많을 것이다. 라고 하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서 4장6절에서,

*야보고서 4:6,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더 많은 은혜, 더 큰 은혜를 이야기하니까 마치 내가 받은 은혜가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고 뭔가 더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여러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단번에,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내게 주신 그 은혜는 하나님 날마다 부어주신 은혜고 그 은혜가 끝이 없으며 완전하고 날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은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되는 더 많은 은혜 더 풍성한 은혜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보다 나은 경제적인 삶, 지금보다 더 나은 삶, 보다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것만은 여러분 아닐 겁니다. 왜냐면, 우리가 과거보다 더 좋은 삶을 누리고 있었더니, 그때 신앙을 잃어버렸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되고, 지금보다 더 어려운 현실에 건강의 위험에 빠졌을 때, 그제서야 더 하나님의 애들을 붙들고 사는 분들이 있는 걸 본다면 환경적인 거나 상황적인 거에 의해서 더 좋아졌다고 해서 그것을 꼭 더 많은 은혜가 더 풍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제 목회를 하면서 이제 심방을 잡는다. 비즈니스라고 있는 우리 권사님의 댁에 심방을 가게 되죠. 심방을 다 하고 나서 권사님께 묻죠 권사님 무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까? 기도 제목을 알려주십시오. 말하면 어떨 땐 좀 충격적인 기도 제목을 나누시는 권사님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이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 사업 망해야 됩니다. 망하기 위해서 제대를 달라는 거예요. 그 남자 짓을 한 남편은 옆에 둘이 많습니다. 망하게 가라고? 아니 무슨 기둥을 세우고 그러겠습니까? 이상해 우리 남편이요. 사업이 힘들고 어렸을 때는요 예배 한 번 빠진 적 없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매달리고 얼마나 하나님 찬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사업이 좀 될 만하고 조금 나올 만한 하니깐 교회도 안 가구요. 놀기 바쁘구요. 우리 사업 남편 망해야 되는데 안 가고 그래요. 기도해 달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나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죠 그분의 심정은 아니에요. 어렵고 힘들었을 때는 하나님 은행 가운데 있었는데, 뭔가 조금 나아졌더니, 하나님과 벌어진 그 남편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나는 그런 기도 제목이었는데, 이건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구해야 되는 정말 더 많은 은행 더 넘치는 은혜는 어떤 은혜일까요?

오늘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이별을 말씀해 보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삶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에게 더욱 많은지, 3절 4절이면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3-4,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우리가 누려야 되는 더 많은 더 넘치는 은혜는 무엇이냐면 예수를 아는 은혜요. 조님을 닮아 가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래도 우리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계속해서 변화시키시죠. 주님을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그때마다 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우리에게 넘쳐난 은혜의 삶을 살게 되고, 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술을 알게 되고 예술을 닮아간 은혜를 얻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은혜가 넘치고 계속 피해서 은혜의 선순환들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닮아감으로 얻게 되는 큰 은혜는 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크게 2가지를 우리가 함께 나누길 원하는데요. 우리가 은혜 속으로 들어감으로 얻게 되는 영적인 역사와 은혜는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죄를 이기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감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는?
I.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죄를 이긴다.
-사단 마귀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합니다. 우리의 삶에 은혜가 멈추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유혹해 만들고, 유혹이 빠져 넘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게 할려고 하죠.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죄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로마서5장 21절의 말씀을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21,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는 제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 같이 계속해서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은혜에는 그 죄의 길을 다 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에스 루이스 기독교 작가인 시스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라는 편지에서 이제 각 사단의 일을 시작하는 조카 워무두에게 사단의 전략을 그 편지로써 쓰게 되는데요. 그 삼촌인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워무두에게 이런 말을 하나 했습니다. 믿는 성도를 환자라고 표현했는데요. “니가 지금 맡고 있는 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참으로 내 마음이 착잡하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 환자의 정신적인 신체적인 습관은 항상 우리 편에 있으니 말이다.” 이게 말 무슨 말이에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육체의 본능과 유혹을 받으면 쉽게 넘어지고 쉽게 쓰러지는 그 습관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가는 길을 끊어버리기 시작하죠. 또 로마서 5장 21절의 말씀에, 우리 한번 다시 한 번 이 말씀 듣겠습니다.

*로마서 5:21,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무리 제가 힘이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제가 우리 가운데 왕 노릇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그 의외의 진리가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거예요. 죄 영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절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그마다 큰 겁니다. 그 죄의 뿌리와 죄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요. 로마서 6장 15절에 말씀에,

*로마서 6:15.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죄 사막 가운데 있을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요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와 싸워야 됩니다. 여러분이 죄와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죄를 떠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은 싸우지 않아요. 빛이 임하면 어두움은 떠나가게 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은 절대로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최근에 인터넷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중간에 VS 하나님과 사단이 마치 견주어 싸우는 것처럼 표현된 그림이 있는데, 정말 비성경적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단과 싸우지 않습니다. 사단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죄와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임하면 우리 세상에 재와 역사가 떠나가게 되는지 믿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1700년 전에 여러분 다니엘 게이 루이라는 사람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이 있는데요.

이 법칙을 게이루이 법칙으로 얘기하는 건데, 한국말로 얘기하면 양력입니다. 양력은 뭐냐면 비행기가 뜰 때 기상을 쓰이는 힘이죠.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들은 여러분 지구의 중력의 지배를 받죠. 그래서 땅에 2발로 서 있게 됩니다. 근데 비행기를 날 때, 그 양력에 의해서 중력을 이고 하늘을 날죠. 여러분 비행기가 하늘을 날 때 사람들은 중력이 없어졌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중력은 있으니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하지만 그 중력을 이기는 힘이 있는 거예요. 양력이 있으니깐 비상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에 죄 유혹과 죄 지배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 앞에 우리가 지배를 당하지 않고, 우리가 그거 앞에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 힘으로 우린 날마다 승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심 있는 사람들을 믿었다고 해서 문제와 어려움이 없어지나요?

여전히 동일한 문제와 어려움과 고민과 환란을 겪게 되죠. 하지만 그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뭔데 뭐 문제없는 교회 없고, 문제없는 가정 없고, 문제없는 인생 있죠. 하지만 그 문제를 만날 때 문제를 넘어서는 인생이 있고 문제 앞에 넘어지는 인생이 있는데, 그 문제를 넘어서게 하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것이죠. 그 은혜 속으로 날마다 들어갈려면,,, 자 어머님께서 지금 목사 이렇게 목회자 사모님이신데, 목회하는 아들에게 항상 목회 하면서 저한테 누누히 말씀하시는 몇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씀하세요.
“대혁아, 사람은 말이다. 은혜를 받으면 순한 양이 되지만, 은혜가 마르면 사나운 늑대가 된다.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저는 항상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은혜가 넘치도록 교회의 은혜가 가득하도록 항상 말씀을 준비해야 되고, 항상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은혜가 넘치면 순한 양이 되지만 은혜가 메마르면 사나운 늑대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잖아요. 하지만 하나님 은혜가 메마르면 모든 것이 다 거친 광야처럼 느껴지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거죠.

남가주 사랑의 교회 20년 전에, 이제 선교부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때 오정현의 사랑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한 8개월 정도 목사님을 모시고,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이민자의 삶을 옆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저 역시도 유학생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고, 왜 이렇게 막막하고 왜 이렇게 힘든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참 벅차고 힘겨웠던 때가 있었어요. 근데 그때 이 주일 예배 때마다 그리고 토요예배 때마다, 그때 담임 목사님이셨던 오정현 목사님께서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늘 외치게 하셨어요. 늘 이렇게 외치셨어요.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저는 그 외침의 지도가 저한테 그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산에 확 불어오는 겁니다. 그 은혜의 힘을 입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죠. 그래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정말 그거 외치고 싶어서 그거 부르짖고 싶어서, 왜요 그러며 살거든요.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저희 교육을 하고 준비한 레벨 레이트 드릴 때 항상 선생님들에게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능력해 당부하면서 말씀드리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사람인데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할 때, 주님, 주님 내게 오늘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이 자리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어주십시오. 오늘 주님 내게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주님 붙잡은 손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주님,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힘든 삶 가운데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답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지혜요? 사람의 능력이요? 많은 것을 가진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 모두가 보게 되죠. 사랑의 교회가 내일 주일 그리고 토요 비전 새벽 예배 때, 또 서요 성경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 7천 용사들이 모여서 주여, 은혜를 주시라고 외칠 때, 교회 안에 하나님의 풍성이 넘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역사가 넘치게 임하게 될 줄 믿고 그곳에 부르짖는 성도들마다 가정들마다, 자녀들마다 사업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떠나듯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돌아가면 모든 문제와 모든 어려움은 떠나가게 됩니다.

그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를 알아감으로 또 지금을 닮아감으로 누리게 된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죄를 이기는 것이라면, 문제를 뛰어넘게 하시는 승리라면 두 번째는 저와 여러분을 낙심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감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는?
II. 두 번째는, 낙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왜, 내 눈에 보이는 내 주변의 환경은 사람들이 볼 때 이전보다 안 좋은 것 같은 거예요. 막막하고 힘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참 두렵고 걱정이 되는 건 많겠지만, 겉 사랑은 그렇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집니다. 어떻게 돼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가 시작된다. 라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걸어가셨던 그 길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부활시켜 살리시고, 모든 이름이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여러분 광야로 쫓겨나 살인자로서 이제 숨어 지낼 때, 다시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에는 그 모세를 다시 세워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웠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고자 했지만, 풍랑을 만났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하여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으로 말했던 이 요나 인생이었지만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 그를 다시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였던 손길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장인인 사울의 손에 죽음의 위엄을 받아 광야로 쫓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저 정신병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광약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는 많은 믿음의 동력 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영광을 보게 하셨던 하나님의 마지막 결과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실종자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사울 봤어? 사울 봤어? 어디 있는지 몰라, 죽은 거 아냐? 실종된 거 아냐? 무명으로 끝날 수 있는 그 인생을, 한 해 3년의 걷는 시간 그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가지고 신학을 집대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귀한 믿음의 종으로 쓰였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이를 만나도,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낙심하지 말 것은 하나님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삶에 새 일을 행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낙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저희 교회에 참 믿음이 귀한 한 형제가 있습니다. 너무나 귀한 형제인데요. 형제의 아버지는 선교사로서 또 인도에서, 중국에서 평생 선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형제 역시 또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지 못했고, 또 인도에서,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가 이제 안 10년째 미국에 와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이제 시작할 계획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이제 교회 조명 파트타임 간사를 뽑는다고 하니까, 이 형제가 지원을 했어요. 그 이유로 경제적으로 도와야 될 형편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학교에 가서 이제 2년제 대학교에 가서, 이제 4년제 대학 갈 수 있는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평일에는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일하고 있었고, 또 주말에는 교회 와서 우리 조명 간사로 이 사약을 열면 귀환 환자였는데요.

조명 간사할 때, 이제 예배 때 키고 끄고 이런 정도의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이 형제가 유튜브를 통해서 그 기계법을 알고 교회 안에 예배를 정말 조명으로 편성하기 위해서 많이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들을 감당해 줬던 대한 형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을 통해서 진행되던 영주권이 거절이 됐어요. 신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 있지만 유학생으로 공부하기에는 1억에 가까운 학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한국에 가자 이 고등학교까지 나온 기록이 없는 거예요. 제가 다녔던 인도와 중국에 다녔던 현지 학교에서 학적 끈을 띄울 수 없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검정고시를 가야 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안 했으면 이 검정고시 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유일하게 검정고시를 보고 이제 직업군인을 하는 게 이 형제가 갈 수 있는 부모님께 이제 경제적 도움이 돼야 되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한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이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교육, 조명, 간사를 열심히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20살 이 젊은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인생의 너무나 큰 위기 있고, 막막함이었습니다. 아버지 선교사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마치 자신의 인생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듯한 그 현실 가운데서 그래서 참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하고 성실한 형제로 그러다가 형제가 이제 이곳저곳에 트랜스포 할려고 이제 어 이력서를 학교에서 입학 모집서를 넣는데, 이제 영주권이 안 되니깐 지원했던 뭐 리셑을 당한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학생에게 한 학교가 너를 학생으로 받아주겠다고, 입학허가서를 준 거예요. 그 대학교가 유시버클리 대학입니다. 굉장히 좋은 대학입니다. 근데 대학생이 아니라 영주권자처럼 학비를 내걸어 다닐 수 있도록 그런 기회를 주는 거예요. 사실은 그럴 수 없거든요. 근데 저는 여기서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 그 대학에 갔다. 라는 것으로 간증이 마무리되는 게 아닙니다. 더 놀라운 사건이 뭐냐면, 그 형제가 UC 버클리에 무슨 과를 들어보느냐가 중요해요. UC 버클리 엔지니어링은 미국에서 전미 2등 상위 정도 하는 일을 하는데, 그 형제가 전공했던 지원했던 합격했던 과가 뭐냐면 음향, 조명 엔지니어 꿈이 없었어요. 그냥 아버지 따라왔던 인생 가운데 뭘 해야 되게 막막했어요.

근데 인생의 마지막과 같은 정말 막다른 그 현장에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했던 조명을 하면서 이 여기서 꿈을 꿉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엔지니어인데 미국에서 전위 2등 3등 하는 그 학교에서 이렇게 학생으로 오라는 겁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를 그렇게 놀리지 않나요? 엄청난 사건이에요. 아하, 진짜 뭘 깨달았냐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려야 되는, 막다른 길 같지만 포기해야 될 것 같지만, 그곳에서 내가 낙심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 것은 하나님 반드시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8월에 이제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와요. 그럼 이런 일들이 이 형제만 있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우리의 삶을 마치 벼랑 끝으로 막다른 길로 인정하시죠. 그 길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깨우는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주님, 그래서 뭐가 필요해요. 나는 주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주님 내게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길이 안 걸고 주님 내게 은혜 주지 않으시면 나는 하나도 살지 못해요. 이때 하나님의 그 은혜가 시작되는 거죠. 새 일을 향하시는 일, 길을 여시는 게 가장 좋은 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넘치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그 은혜가 먼 기억의 외계인가요? 가끔 권사님 장모님들 만나 이럴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래 봬도요 젊을 때는요. 30년 전에는요. 20년 전에는요. 힘이 있었을 땐요. 그대로 달랐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도 나에게 있습니다. 마치 갈렙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때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라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먼합니다. 그 은혜를 바라보며 사모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죄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있는 모든 문제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신실한 길로, 은혜의 길로 생명의 길로 열어주시는 그 은혜가 더욱은 삶 가운데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때마다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아, 주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엎드려서 내려놓고, 날마다 주의 은혜 가운데 돌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더 많은 은혜, 더 넘치는 은혜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 그 은혜를 통해서 죄를 이기고, 문제를 뛰어넘는 환경과 상황을 압도하는 승리하는 길을 걷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에 막다른 길과 같은 어려움과 벼랑 끝에 서는 시간이 있다할지라도 그때 내가 부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밖에 없음을 확신하여 주님의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뜻을 날마다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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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7월 15일 (854)


1. 증시에서 거래가 얼마나 활발한지 보여주는 지표다. 일정 기간의 거래량을 상장주식 수로 나눈 값은?
① 주가수익비율 ② 주가순자산비율
③ 자기자본이익률 ④ 상장주식회전율


2. 이 나라 총선에서 14년 만에 노동당이 보수당을 이기고 정권교체를 이뤘다. 수도는 런던, 화폐는 파운드를 쓰는 이곳은?
① 프랑스 ② 영국
③ 이탈리아 ④ 스웨덴

3. 경기 동향 지표인 ‘구매관리자지수’와 기업 인수합병(M&A) 이후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작업인 ‘인수 후 통합’의 공통 약어는?
① CPA ② CPI ③ PCE ④ PMI

4.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압도적 점유율을 바탕으로 미국 증시 시가총액 ‘빅 3’로 성장한 기업은?
① 브로드컴 ② 세일즈포스
③ 엔비디아 ④ 테슬라

5. 시멘트의 주재료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가격이 급등락해 국내 건설 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준 원자재는?
① 유연탄 ② 철광석 ③ 리튬 ④ 니켈

6. 올 들어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핵심 목적은 무엇일까?
① 리쇼어링 촉진 ② 국내 증시 활성화
③ 보편적 증세 ④ 세수 증대

7.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공장이 이 나라에서 지난 3일 가동을 시작했다. 세계 1위 니켈 생산국인 이곳은?
① 인도네시아 ② 인도
③ 멕시코 ④ 아르헨티나

8. 기업에 안정적 수익을 가져다주는 ‘현금 창출원’을 가리키는 말은?
① 오픈소스 ② 카르텔
③ 정크본드 ④ 캐시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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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인구 감소 위기는 청소년 세대의 문제



그래픽=김선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우리나라 인구 위기와 관련한 뉴스가 연일 쏟아집니다. 급기야는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며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대통령은 ‘2030년까지 합계출산율 1.0명’(작년 기준 0.72명)을 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란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습니다. 그동안의 출생아 수 감소로 인해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15세 이상 인구)는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로 계산해도 2040년까지 19%가량 줄어들 것이란 대한상공회의소의 전망도 나왔습니다. 경제활동이 위축되면 국민이 나눌 ‘파이(경제적 부)’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고령화와 수도권 인구 집중 여파로 2대 도시인 부산마저 ‘소멸위험지역’에 포함됐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2030년이나 2040년 즈음엔 생글생글 독자들이 20~30대가 될 텐데요,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 이같이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런 미래를 살아내야 할 이는 현세대도 현 정부도 아닌,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인구 감소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경제 외형이 작아질 수 있는 시대에 적응할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구 위기가 왜 청소년 자신의 문제인지, ‘인구 역발상’에서 배울 점은 없는지, 지방소멸 대응이 왜 중요한지 등을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구 비상사태'에도 지나친 비관은 금물
사회에 이롭게 활용하는 역발상 필요하죠.

연합뉴스

인구의 크기는 이미 한 세대 전의 출생아 수에 의해 정해진다는 점에서 ‘정해진 미래’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면 인구정책을 짜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닐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출생아 수)이 1983년 이미 2명대로 떨어졌는데도 출생아를 줄이려는 정책을 계속했고, 1996년 1.6명에 이른 뒤에야 가족계획을 중단했습니다.

“인구 절벽, 2030년 이후 체감될 것”

인구 감소가 위기 상황으로 인식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으면 인구가 자연적으로 감소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인구의 자연 감소가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2022년엔 연간 출생아 수가 24만9000명으로 줄었는데요, 수도권 대학의 정원은 전문대까지 포함해 약 25만 명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젊은이가 지방대학에 가려고 할까요? 지방대 입시에서 대량의 정원 미달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출산이 심각해진 것은 2002년부터입니다. 2001년 출생아 수 60만명이 무너지더니, 다음 해인 2002년 약 49만7000명으로 50만 명이 깨졌습니다. 이때 태어난 사람들이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과 마찬가지로 지방 기업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지방의 인재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수도권에 더욱 몰려들 테고, 지방에선 고령화와 슬럼화가 가속될 수밖에 없어요.

흔히 말하는 ‘인구 절벽’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인구 전문가인 조영태 서울대 교수는 25~59세의 일하는 인구가 2027년 2500만 명 아래로 떨어지고, 2028년부터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 이하로 내려가야 인구 절벽을 체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인구 위기는 현세대가 아닌, 지금의 청소년들이 체감하고 마주하게 될 현실이란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역발상으로 접근하는 인구 위기

그러면 인구 감소를 위기 요인으로만 바라봐야 할까요?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어떤 나라든, 그 나라의 번영 정도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척도는 인구의 증가”라고 했습니다. 조지프 슘페터도 <경제분석의 역사>에서 “인구 증가는 부의 창출의 주된 요인이고, 인구는 부 그 자체”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전통적 이해에선 인구 감소는 큰 문제입니다. 경제활동을 하는 인구가 줄면 나라의 부가 감소한다는 실증연구도 많습니다. 보건사회연구원은 2050년 국내 생산가능인구가 2022년 대비 35% 감소하고, 이 때문에 국내총생산(GDP)이 28%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나라에서 고령화로 인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포인트 늘어나면 경제성장률이 0.2~0.6%포인트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청소년 입장에선 이로운 점도 있을 겁니다. 인구가 줄면 대입 경쟁률이 낮아져 사교육 문제가 개선될 여지가 있어요. 취업난과 환경문제가 완화되고 경쟁 압력이 줄면서 삶의 질이 나아질 수도 있죠. 특히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뺏어가고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주행하는 시대엔 인구가 줄어드는 게 축복이 되지 않을까요?<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의 저자인 요시카와 히로시 일본 릿쇼대 교수는 인구 비관주의가 지나치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결정짓는 것은 인구가 아닌, 혁신(innovation)과 노동생산성이라고 강조합니다. 인구 감소가 전체 국민소득을 줄일 순 있어도 혁신이 성공하면 1인당 소득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거죠.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명예교수는 한 콘퍼런스에서 “고령화로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는 성장잠재력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도 “AI 등 첨단기술 발달로 이런 상식이 더는 통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고령자가 노동·소비시장에 계속 참여할 수 있다면 고령화는 젊은 세대에 부담이 아닌, 인구 위기 극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터를 고령자 친화적으로 바꿔나가면 더 오래 일하고 생산성도 유지하는 사회가 돼 인구 위기 대응이 가능해집니다. 모든 사회 현상에는 긍정·부정, 유익·무익 등 양면이 존재합니다. 인구 감소 문제를 우리 사회의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는 역발상이 필요한 때입니다.

NIE 포인트
1. 우리나라 연간 출생아 수와 합계출산율 데이터를 50년치 정도 뽑아 살펴보자.
2. ‘인구절벽’의 개념을 알아보자.
3. AI 시대에 인구 감소가 축복이 될 수 있는지 친구들과 토론해보자.


인구 감소·지방 소멸은 동전의 양면
함께 풀어야 인구 위기 넘을 수 있어.


한경DB

인구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달 일·가정 양립, 주거·출산 등 지원, 교육·돌봄 등 세 가지를 축으로 60여 가지 대책을 묶어 발표했습니다. 예를 들어, 육아휴직 급여 상한을 150만원에서 250만원으로 올리고, 유치원·어린이집 이용 시간을 12시간까지 늘려주기로 했습니다. 또 출산 가구에 주택공급 확대, 자녀 세액공제 확대, 난임 시술 대폭 지원 등에 이어 인구전략기획부라는 정부 부처 신설도 추진하기로 했어요.


경제적 지원책 중요하지만…

이번 대책에 대한 평가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나옵니다. 정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을 줄여주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혼인율이 낮아지는 현실에서 얼마나 효과를 낼지 의문이라는 반응이 있어요. 상대적으로 결혼할 여유가 없는 소득 하위층엔 도움이 안 될 것이란 우려도 있습니다. 과도한 입시·취업 경쟁, 너무 비싼 집값과 사교육비, 성평등이 부족한 사회문화, 출산을 행복으로 여기지 않는 현실 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물론 경제적 지원의 가치를 무시할 순 없어요. 직원이 아이를 낳으면 출산장려금으로 1억원을 주는 부영그룹이 화제를 모으면서 이 그룹 공채에 작년의 5배가 넘는 지원자가 몰렸습니다. 전남 강진군이 2022년 1월 이후 태어난 아이 1명당 5040만원의 육아수당을 지급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 효과 때문인지, 지난해 강진군 출생아 수는 154명으로, 전년(93명)에 비해 크게 늘었습니다. 물론 이런 혜택만 노리고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닌다면 총인구의 증가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원을 다 받은 뒤,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 버릴 수도 있죠. 그래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출산 지원을 늘려가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수도권 집중은 지금도 진행 중

주목할 부분은 ‘지방 소멸’ 위험이란 지적도 있습니다. 지방의 젊은이들이 진학과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수도권으로 옮겨가면서 각 지방은 자생할 수 있는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반면 수도권은 인구 집중과 과밀화로 먹고살기 위한 경쟁이 더 격화되고, 집값과 사교육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뜁니다. 아무리 정부가 출산장려금을 지원해도 이 돈이 학원비와 주택 관련 대출의 빚을 갚는 데 들어가고 출산 확대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우림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 연구교수가 초저출산을 겪는 53개 국가 및 지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큰 도시의 인구 비중이 16.2% 이상인 경우,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합계출산율이 낮아지는 정도가 더욱 커집니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일자리나 진학을 위해 자기가 자란 지역을 말 그대로 ‘탈출’하려는 젊은이들을 그 지역에서 잘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지방 소멸 대책이 곧 저출생 극복의 중요 해법이 되는 겁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하는 소멸위험 자료에서 우리나라 2대 도시 부산이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진입했다는 뉴스는 우려를 더합니다. ‘소멸’이란 단어가 주는 과장된 느낌은 경계해야겠지만, 시골만 소멸되는 게 아니라 지방 대도시도 인구가 줄어 활력을 잃어간다는 얘기는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지방 소멸이란 말은 우리보다 이 문제를 먼저 경험한 일본에서 2014년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용정보원이 같은 해인 2014년부터 소멸위험지역을 조사했는데요,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77곳(33.8%)이 소멸위험지역으로 꼽혔고, 지금은 이게 121곳(53.1%)까지 늘어났습니다. 분류 기준은 가임기 여성과 고령자 수의 비중입니다. 즉 지역 내 20~39세 여성 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눠 그 값이 ‘0.5’ 미만이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합니다. 아이를 낳을 여성은 적고 고령화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곳이죠.

정부의 인구 대책은 결론적으로 인구의 지역 간 이동, 사회적 이동 문제까지 풀 수 있어야 합니다. 수도권 인구는 2011~2016년 빠져나가는 숫자가 많았지만, 2017년부터 작년까지 7년 연속 순유입이 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에만 4만7000명이 순유입됐죠. 수도권 집중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NIE 포인트
1.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이 그동안 어떻게 짜여져 왔는지 확인해보자.
2. 수도권 인구 순유입이 2017년부터 다시 늘어난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
3. 지방 소멸 위험을 줄이거나 속도를 감속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친구들과 토론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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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14일) 1부, 4부,
제목: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말씀: 사무엘 상 2:10, 사무엘하 22:50-51,
누가복음 1:46-48
대표기도: 유종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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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10,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사무엘하 22:50-51,
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누가복음 1:46-48,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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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14일)  2부, 3부.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2부ㆍ3부
제목: "이상적인 교회"
말씀: 사도행전 2:41~47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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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1~47,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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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목사님(2부,3부)
-한나의 인생에는 모순이 많았습니다. 그 이름은 한나인데 은혜를부 뜻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그녀의 태를 닫아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생명의 문이 닫혔는데, 주님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나는 거의 남편 엘가나의 첫째, 아내입니다. 첫째는 창세기 일장의 첫째, 날처럼 특별하고 유일하고 유니크한 날인데 첫째인데 넘버원인데 둘째, 브닌나에게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온 나라가 축제를 맞이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정들이 실로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1년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날인데 브닌나는 주님의 집에서도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한나 너 안나 하나님이 너희 태를 닫았는데 무슨 한나 그때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나 보고 왜 우세요. 왜 안 막으세요? 왜 슬퍼하세요?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 웬 근거 없는 자신감? 자식을 낳을 수 없어서 고통당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10아들보다 낫다 이 말이 무슨 도움이 되죠. 엘가나는 한나의 깊은 고통에 신체적이고 영적인 고통에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나를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의 정서에 대해서 반응하는데 늘 서툴러요 의도는 좋은데 결과는 늘 나빠요 나는 나의 아내에게 사과를 하거나 위로를 할 때면 늘 더 화내게 하는 특별한 의사가 저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성전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대제사상 앨리가 한나를 보고 술을 그만 마시게나. 포도주 끊으세요!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제사장께서 이렇게 피상적으로 단정적으로 나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인생에서 모순에 부딪치면 어떤 반응을 합니까?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좌절스럽고 다 포기해버리고 싶습니다. 또 때로는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어서 오히려 공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좀 살아보니까 모순이 인생의 기회구나! 아이러니가 패러독스의 기회구나! 모순이 역설의 기회구나! 아 이 모순은 나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라고 하는 현실로 내게 다가온 것이구나! 한나는 자신의 모순을 방치하지 않고 대면하였습니다.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갔습니다. 한나는 태가 닫혔지만 아들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문이 꽉 닫혔는데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았으니 하나님이 여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나는 믿음을 선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직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힘을 준만큼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를 방정식대로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은 곡선으로 일하시는 분이고, 변화구를 던지시는 분이고 바나나킥을 차시는 분입니다. 김중권 목사님의 말씀대로 변장된 축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한 나는 하나님께서 만약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아들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평생 갖고 싶은 것을 주시면 내가 그것을 드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상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권리를 내가 포기(抛棄)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유일한 아들 사무예를 하나님께 평생 동안 드리기로 서원하고 있습니다. 평생 드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연대감은 우리 남자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들에게 자식은 분신과 같습니다. 살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인데 평생 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 한나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래 기도 했습니다. 기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기도가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불임의 태, 생명이 꿈틀거렸습니다. 죽은 태가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약동했습니다. 어렵던 마음이 녹았습니다. 막혔던 것이 뚫렸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위축되었는데 영원히 팽창하고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나의 노래는 대작은 아니지만, 아주 강력한 노래입니다. 이미지도 강력합니다. 플롯도 탄탄하고 주제가 선명합니다. 한나는 내 뿔이 높아졌다. 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그동안 너무나 뿔이 없어 가지고 치이고 살았습니다. 조롱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뿔이 솟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내면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니까 내면에 힘이 생겼습니다. 기세가 생겼습니다. 기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신 속에 권위와 위엄이 생겼습니다.
 
뿔이 솟으니까, 추위의 다른 짐승들이 감히 덤비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도 뿔이 솟아나기를 축원 드립니다. 자신의 뿔을 높여주신 주님을 한나는 찬양했습니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다. 주님밖에 다른 이가 없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반석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교 불가능한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 역사와 인생에 개입 하시고야 만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로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질서는 영원한 것 같지만 주님은 권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용사의 활이 어느 날 꺾여버리고 넘어지는 자가 힘으로 뛰뛰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경제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늘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이 역사의 철칙이 되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해서 품을 팔고, 줄이던 자들은 다시는 줄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력과 생산력과 영향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가 히브리어로 아카라, 아카라 가슴 아픈 단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로 가 일곱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많은 자녀를 낳았던 자는 쇠약하다. 한나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나는 이 시의 정중앙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6절예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살리시기도 한다.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고 서울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이 시에서 한나의 시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입니다. 정중앙에서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한나의 시에서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까?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님에 대한 찬양이 왜 놀라운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이 말씀은 모세의 노래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 모세가 한 말씀입니다.
 
*신명기 32:29,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 사를 총정리하면서 모세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 시도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한나는 모세의 고백과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탄생과 소멸은 단순한 자연적 과정만은 아니다. 주님은 인생과 역사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한나가 연이어서 7가지를 분사 형으로 말하는데 하나님이 늘 하시는 일,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 일곱 아들을 얻은 한나가 7가지 찬양을 하시는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 하신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한 민족과 나라와 가정과 개인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데는 주님의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높아짐과 낮아짐은 인셜라도 아니고 별자리도 아니고 묘 자리도 아니고, 주님의 주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은 가난한 자라.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 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비로소 한나가 부자가 아니라 귀족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빈궁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이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정치적으로는 장로교입니다. 신학 사상으로 말하자면, 개혁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실천에 있어서는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복음주의운동은 1846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한참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사회적 모순이 너무 많이 일어났고 어린아이들을 일찍 공장에 보내고 하루 종일 일하게 하는 그런 모순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모순이 극심했고 그래서 1948년에는 칼 막스와 앵겔스가 커뮤니스트 매니페스토, 공산당 선언을 하는 그런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복음주의가 우리의 믿음은 복음 증거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요. 사회 개혁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로잔 언약은 복음 전도와 사회적 관심은 상호 배타기적이지 않고 교회는 이 두 가지 의무를 늘 같이 수행해야 한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한교섬도 하고 사랑 광주리도 하고 열심히 이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주님은 빈궁했던 우리 가난했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강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가난한 자 빈궁한 자는 본질적으로 영적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영광의 자리로 기어이 인도하십니다.
 
한나는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저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로 맞히고 있습니다. 아직 왕이 없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입니다. 그렇지만 한나는 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는 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누가 이룰 것인가? 가난한 자를 진토해서 일으켜서 영광의 자리로 인도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실현할 자가 누구인가?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뿔을 높이신 주님께서 메시아의 뿔을 높이셔서, 이 사사 시대의 마지막 대혼란을 정리해주실 것을 한나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나는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갈 자신뿐 아니라 메시아 왕을 통하여 온 나라가 영광의 자리로 나아갈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한나의 기도는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사무엘서는 한나의 노래로 시작을 하고, 다윗의 노래로 마치고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가 사무엘서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를 붙들고 그 꿈을 이룬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예언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 한나의 노래를 꽃피우고 확장하였습니다. 사무엘하 22장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51절 52절, 대작은 시를 썼습니다. 왜 시인들은 이런 대작은 시를 쓸까요?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모순을 역설로 만드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 수많은 죽음을 뚫고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 다 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세에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인으로서, 내 시가 얼마나 멋지겠어요. 저 있는지 여러분들 알기나 하시오? 이런 걸 또 좀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큰 그림을 우리에게 큰 그림을 그려줘서, 우리가 너무 작은 그림을 그리고 살면 모순 속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늘 큰 그림을 우주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큰 구원이었다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의 노래를 계속해서 가져오고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뿔을 높이신 주님의 능력을 찬송하다가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주님께서 높이 들릴 것이라고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이제 뭐라고 찬송합니까? 3절에 보니까, 주님은 너의 구원의 뿔이시다 주님이 내 구원의 뿌리시다. 한나가 바라본 그 뿔이 다윗에게 난 것입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노래했는데 다윗은 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 하셨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구원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이미지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라는 노래였는데 다윗은 이 반석 이미지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구원의 피난처가 되는 이 반석 이미지를 이 시에서 계속 뿌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내가 피할 피난처시여 나이 망대시오. 32절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왜 누가 하나님이시며, 우리 하나님 왜 누가 반석이시냐? 47절에,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인생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나는 늘 흔들리고 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지만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다. 거대한 삼각산 같은 인수봉 같은 마사달 같은 영원히 피할 반석이라고 한나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나에게 원수가 있었고, 대적이 있었는데, 다윗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내 대적이 강한 원수들이었다. 그들은 프로들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었다. 사악한 자들이었다고 원수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의 핵심 주제는 여호와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고 노래했는데 다윗은 28절에서 주께서 권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라. 사무엘서 전체 주제가 높이시는 하나님, 낮추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센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기어이 낮추고 마시는 엘리를 낮추시고, 사울을 낮추시고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을 높이시고 다윗을 높이시는 이 운명의 역전을, 사무엘에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주님을 그러니까 다윗은 늘 마음의 자리가 영광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곤고한 백성들의 신음에 그들의 고통에 그들의 토탄에 그들을 어떻게 새롭게 하고 갱신할 것인가에 다윗은 있었습니다.
 
한나가 마지막으로, 여왕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며, 자기 왕에게 힘을 주소서! 라고 기도를 했는데 바위선 44절에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나를 섬기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주님께서 다윗을 모든 열방의, 모든 민족의, 모든 언어의 머리로 대표로 세우실 것까지는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열방의 메시아로 세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한나도 못 본 부분이 있었습니다. 한나의 핵심 주제는 영원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서울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었는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를 다 물리쳐 주실 것을 바라보았고, 거의 원수들을 스올에 던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자신은 영광스러운 메시아가 될 것으로 착각했는데, 이 스올에 던져진 사람은 거의 원수가 아니라,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다. 다윗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죽음의 물결이 죽음의 물결 가운데 다윗은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스올의 포승줄이, 죽음의 사자의 포승줄이, 나를 꽁꽁 매어 싸고 삼왕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메시아가 스올에 던져졌습니다. 다윗은 온갖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비선형적 통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윈이 거기에 자신이 이렇게 내가 열심히 사는데 어찌하여 내가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는 죽음 가운데서 기도했고, 다윗이 스올에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지시기 위해서 하늘 성전에서 친히 내려오시는데, 하늘장막을 찢으시고 친히 천군천사와 바람 날개를 타고 걸음을 타고 내려오시면서 흑암을 뚫고 내려오시고 그러니까 땅이 막 뒤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우뢰 소리를 발하고, 그 깊은 죽음의 물 가운데서 다윗을 구원하는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예수 믿어 재산 받는 구원만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주적인 전쟁 가운데 하나님께서 물에 빠져 죽음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건져 주시는 어마어마한 우주적 전쟁의 사건 가운데서 다윗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대한민국을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적인 헌법도 주시고 제헌절도 주시는 이런 하나님을 다윗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다윗이 내가 받은 구원이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0절에 다윗은 이름으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 죽게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다. 로 마치고 있습니다. 18장 50절 “내가 모든 열방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겠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구원 사를 쭉 이야기를 하다가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네요. 로마서 15장 9절에,
 
*로마서 15:9,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세계 선교의 핵심적인 구절이 되겠습니다. 복음주의 신앙고백을 이렇게 정수로 만든 로잔 언약에서는 이 구절을 가지고 해석을 할 때, 세계의 모든 교회가 홀 처치가, 홀 가스팰을, 온전한 복음을 홀 월드의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다윈을 통하여 이렇게 확장되고 전개되면서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나라는 망했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왕권을 잃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다윗의 꿈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한나와 다윗의 노래를 가져오면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이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몇 절 되지 않습니다. 참 소박합니다. 수수한 노래입니다. 모짜르트도 여기에서 매그니피컷을 노래했는데, 세바스찬 바흐도, 슈베르트도, 리발디도 누가 복음의 첫 찬양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래 자체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한나의 기도와 다윗은 노래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참 담백한데 특별합니다. 유니크하죠.
 
이런 노래가 없죠. 왜요 왜 그렇습니까? 배경이 놀랍습니다. 이 찬양의 배경이 뭐냐 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잉태하고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갔는데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나자마자 태중에 있던 태중에 있던 요한이 태 안에서 태 안에서, 기쁨으로 내 복 중에서 뛰놀았도다. 태 속에 있는 아이가 복중해서 뛰놀았다. 이 뛰놀았다는 이 헬라의 단어는 히브리어로 번역을 하자면 춤추다. 의 춤추다 아이가 태속에서 춤을 추는, 아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임재를 태속에 있는 아이가, 아기 예수 앞에 6개월 늦게 생긴 아기 예수 앞에서, 임재를 느끼면서 춤을 추는 성령으로 부른 찬양입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마리아가 찬양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약동과 충만, 성령께서 직접적이고 전인격적인 감동을 주시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송가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구절들이 대부분의 구절들이 하나의 노래에서 온 것이고, 다윗의 노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나가 내 마음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내가 주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라고 찬양했는데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 노래의 중심 사상은 48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 비천하다. 한나는 이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상황을 비천(卑賤)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가 말하던 주리던 자, 임신하지 못 하던 자, 가난한 자, 빈궁한 자, 걸음더미에 있는 자, 이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비천하다 우리가 지금 참 비천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 자신의 상황이라기보다는 온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가 느끼는 비천함은 영적이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늘 우리가 한없이 비천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천한 나에게 비천한 나에게,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하겠다.
 
다윗은 큰 구원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후손을 통해서 큰 구원을 바라보았는데, 주님의 큰 구원이 나사렛에서의 처녀 마리아에게 큰 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나 큰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만세에, 만세의 나를 복이 있다. 행복하다고 일컬을 것이다. 마리아는 만세에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이 개혁주의 조직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성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 되기를 원하셨다.
-헤르만 바빙크-
 
구원사의 정점이 하나님이 인류 역사에서 이루실 가장 큰 사건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는 이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영광이 이제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냥 신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견줄 바 없는 하나님이 영광의 모든 속성을 가지신 그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인 우리와 같이 되신 것입니다. 무한히 유한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시간 속에 들어왔습니다. 불변이 가변이 되었습니다. 창조주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존 자께서 엄마의 태속에 있고 어머니를 젖을 파는 완전한 의존 자가 되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습니다. 초자연이 자연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신비입니다. 초월입니다. 비선형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하고 똑같은 혈육을 입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은총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이제는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마리아가 말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주님의 자비로움이 은총이 우리에게 캐쉬가 된 것입니다. 성육신의 하나님께서 이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평생 우리가 어떤 인생의 과정을 통과하든지 간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53절에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이제는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더 이상 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성육신의 약속은 다윈에게 약속한 것 정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치 3명의 오페라 가수들이 각자의 아리아를 부르는 것 같은 한나가 자신의 아리아를 불러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51절에 걸치는 찬양을 드리고, 마리아의 그 청순하고 아름다운 이 매그니픽 컷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 세 사람 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모순의 극치 가운데 살았습니다. 극한 모순 가운데 살아서 극단적 모순 가운데 살았지만 이 인생의 모순을 대면하고 역설로 디바인 패러독스로 하나님의 패러독스로 만들어서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 다 각자의 많은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생명으로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몸을 입고 오신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너무나 많은 모순들, 문명사적인 선언 속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과 모순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수많은 모순을 맞닥뜨리고 받아들이고, 패러독스로 만들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뿔이 높아질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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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3부.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2부ㆍ3부
제목: "이상적인 교회"
말씀: 사도행전 2:41~47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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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1~47,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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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조금 아까 오정현 목사님 전화를 주시면서 거기 지금 몇 시입니까? 그러니까 토요일 날 저녁 한 7시 반, 8시 됐다고 그러시더라구. 내일 주일날 아마 거기서 설교하시는 것 같은데, 저더러 떠나시기 전에도 목사님 예배 좀 잘 드려주세요.
 
그러고 떠나시더라구 그래서 2부 예배 잘 드렸는데 3부 예배도 잘 드릴 것을 믿습니다. “이상적인 교회”, 오늘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하고 사랑의 교회하고 비교를 해 봤는데 그때 피 예배당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을 거라고 느껴지지만 하루에 3천 명이 더해주는 걸 보면은 거기도 많이 모였구요. 그때 찬양대가 여기 찬양대 만큼 했는지, 난 잘 몰르는데 그래도 찬양을 그때 했을 것 같고, 사실 교회는 빌딩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인 줄 믿으시면 알면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까 2부 예배에 ‘이상적인 교회’ 만약 규정한다면, 오늘 본문에 난 말씀을 근거로 성장하는 교회 그로잉 러치, 어린애가 자라서 성장해야지 정상적이죠. 교회가 개척해 가지고 계속 성장해야 이상적인 교회가 되고 두 번째로, 2부 예배 말씀드린 게 선교하는 교회 고잉 처치, 제가 중앙교에 목회할 때 장기 선교사는 안 되더라도 단기 선교사로도 1번 다녀오라고 내가 목회하는 동안에 우리 중앙 교회 성도들은 다 선교 지를 1번 다녀오라 그랬어요.
 
선교하는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다. 그래서 오늘 세 번째로는 빛나는 교회, 글로잉 트러치 네 번째 눈물 있는 교회, 이제 이렇게 마감이 될 텐데 만약 2부 예배 안 나오신 분들은 아마 카세트 사시면은 2부 예배 설교가 나올 거예요. 자 어느 날 3부에 빛나는 교회가 글로잉 처치, 사도 행전 2장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이것이 빛나는 교회, 사실 글로잉 처치, 사랑의 교회 어디서 봐도 빛나는 교회예요.
 
사람들이 많아서도 아니고, 건물이 좋아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교회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빛나는 교회예요. 울리엄 캐리, 소년이죠.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꿈과 소망 없이 살아가던 울리엄 캐리, 예수님을 믿고 인생관이 완전히 변했어요. 가치관이 달라졌고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변화를 시켰어요. 울리엄 캐리, 그는 구두 수선 가게를 차려놓고 그 앞에다가 세계 지도를 펴놓고 거기 3가지 표현을 써놨어요.
 
큰 비션을 가져라. 그레이피션, 두 번째로, 큰 기도를 해라. 그레이트 프레이, 세 번째로, 큰 기대를 걸라. 그레이트 익스펙테이션, 그 3가지를 써놓고 매일 구두 수선을 하면서 선교의 꿈을 접지를 않았습니다. 남의 구두 수선 가게에서 수선을 하나 사람이 꿈을 품어 봤자 수선 가게 하나 정도 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지만은 윌리엄 캐리의 꿈은 그거하고 달랐습니다. 그는 세계 지도를 품에 넣고 그 당시 아무도 외국 선교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자원을 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후원자도 없을 텐데 아내까지도 선교사 나가는 걸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선교의 아버지, 선교의 원조 윌리엄 캐리,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꿈을 가졌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 때문에 오늘도 희망차게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빛나는 교회는 꿈과 환상을 가졌다고 하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교회, 사자행전 11장 26절에, 만남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실천하는 교회, 행하는 교회 무엇이 달라도 다릅니다. 자기만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웃과 남을 위한 교회, 사회에서 큰 빛이 되는 교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교회, 사도행전 4장 13절에,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우리 한국 부흥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김익두 목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깡패가 그 동네 친구의 권유로 이웃동네 금산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울리엄 스왈론이라 하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사람이 변합니다. 김익두 얼마나 개망나니였냐고 할 것 같으면은 교회 부흥이 하고 있는데, 거기 신발을 다 걷어다가 화장실에 집어넣는 사람이었고, 그는 산으로 나무를 해러 한 게 아니라 시장으로 나무를 하러 가가지고 제일 보기 좋은 장작은 자기가 지고 갑니다. 누구도 말하는 사람도 없죠. 그러다가 울리엄 스왈론의 설교를 듣고 김익두 전도사는 다시 태어납니다. 어느 날 신방을 다녀오던 중 김익두 전도사는 거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쳐봐 고쳐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데려가 가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했는데 아무 사건이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그 자리 도망칠 수밖에 없어서 김 전도사는 자식의 무능함을 탄식하다가 담요를 싸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금식과 철화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불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전도사님은 성령의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오다가 김 전도사는 얼마 전에 앉은뱅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김익두 목사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 후 2만 명의 난치병 환자들을 안수해 기도해서 고쳐 주었고, 208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200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김익두 목사님과 한국교회 성도들은 정말 군산 천막 교회 집회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교회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6.25 사변이 터짐으로써 공상군에 맞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이런 큰 능력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죠. 김익두 목사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마가복음 9:29,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39,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기도하러, 기도하는 가정은 변화됩니다. 기도하는 개인도 변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도 변화가 됩니다. 기도하는 나라는 반드시 변화가 오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노예 해방에 운동하였던 울리엄 웨어포스는 자기 아들에게 새벽 기도의 중요성을 관하여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니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단다 그것은 결코 아침 기도를 무시하거나 짧게 해버리거나 성급하게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이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달리 없다. 만약 내가 아침부터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를 하게 된다면 너는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울리엄 웨어포스-
 
- 노예 해방을 지지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준 투사의 삶이 올리엄 웨어포스라고 하지요 하루에 첫 시간을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하루의 결과가 어떠리라. 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새벽을 여는 사람은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로,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눈물있는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로잉 처치,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에,
 
*사도행전 2:44-45,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허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함께 울지 않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과 나누지 못하는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3번이나 우셨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새벽마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통행하는 그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
 
여집사님이 남편의 무지한핍박을 가두면서도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주위를 성소하고, 수요일날 저녁 예배 꼭 참석을 했는데 그 남편은 부인이 교회 다닌다고 얼마나 하루는 그 여집사님이 자기 남편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새벽 기도에 가서 앞에 남편의 구두를 놓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신발 임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 교회 장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으로 기도를 합니다. 남편이 벌떡 일어나 보니까, 아내가 없어졌어요. 틀림없이 교세 교회 갔을 거다. 교회를 갑니다. 암만 신발을 찾아도 한쪽밖에 없어. 그래서 다른 신발을 신고 교회 가보니까 자기 부인이 자기 구두 1짝을 갖다 놓고 통곡을 하면서 울면서 이 사람이 교회 나와서 회개하고, 교회가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장로가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그 부인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거예요.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가야지. 부인을 따라서 교회 나가기 시작해서 몇 년 후에 그 교회의 수석 장로가 됐다고 하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그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에,
 
*사도행전 20:31,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랬습니다. 제가 중앙교회 45년 목회를 하면서, 헌금봉토에 기도 제목을 쓰라 그래요.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 90프로가 남편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 제목이에요. 그런 분들이 새벽 예배에 와서 눈물로 통회하면서 남편, 시부모, 예수 믿게 해달라고 통곡하는 사람들, ‘구하라 그러면 너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믄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잃은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식구들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 믿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나 두 번째로,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잠언 10:12에,
 
*잠언 10:12,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 고 했습니다. 1997년 9월에 소천한 테레사 수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녀입니다. 그녀가 그와 같이 헌신하게 된 삶을 살게 된 경위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도중에 테레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테레사야, 너는 5만 명의 거지와 2만 명의 문등 환자가 있는 칼카다에 가서, 그들은 길가에서 나서 길가에서 살다가 길가에서 죽는다. 네가 그들에게 잠자리를 주고, 죽을 때 무덤을 만들어줘라. 테레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2년 동안 인도 여행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8일 마침내 인도 켈커다로 향합니다. 그때 그녀의 팀은 찬송가 1권, 성경책 1권, 입고 있는 수녀복 1벌이 전부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1벌의 옷이 헤어지면 저는 무슨 옷을 입을지 모릅니다. 오늘 밤 어디서 잘지도 모릅니다. 내일 아침 어디서 먹게 될 지도 모르고 떠납니다. 내 일생을 당신에게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후 30년이 지난 오늘날 그녀의 수고로 100여 곳에 고아원이 세워졌고, 세계 각처의 사랑의 선교회 미셔너리 오브 처치가 세워졌습니다.
 
저는 캘커다에 가서 테레스 수녀를 두 번 만났습니다. 가서 만나보니까 키가 작은 할머니 양로원도 하고 고아원도 하고 참 굉장히 서민적으로 사는데, 내가 인도 동북부에서 부흥회를 하고 나오다가 갈 거 다 해서 비행기 타고 서울로 돌아와야 되는데 내 가방에 있던 옷 다 넣고, 그때 선물을 15개를 받았어요. 그게 뭐냐, 사람들이 손으로 짠 셔라고 하는 게 있어 담요 비슷한 거, 각 집하에서 나한테 선물 1 주는데 15장을 받았어요. 제가 그걸 갖고 나와서 테레사 수녀한테 혹시 이게 당신에게 필요하면 내가 다 주고 가겠다. 그게 절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내가 지갑에 있던 돈 그때 딸라 가져갔죠. 다 넣고 내가 입고 없던 1벌만 남기고 다 주고 그 샤 15개를 거기다 다 주고 왔는데, 참 자기 고국을 떠나서 30년 동안 캘카다에 살면서 그 죽어가는 사람들하고 함께 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우인이 됐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에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이라는 말씀 그대로
 
*고린도전서 10:33,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오늘 이 설교를 마치기 전에, 예화 하나를 드리고 마칠게요. 열광적인 샘보다 제자가 쉽다는 윌리엄 볼드의 선교적 생애입니다. 윌리엄 볼드라고 하는 학생은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남들은 국내에서 수학여행을 하는데 올리엄 볼드는 그 부모님이 고등학교 졸업 예물로 세계 여행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볼드는 세계 여행을 하던 중에 예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고통 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회사의 후계를 포기하고 자신의 성경책을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노 리설(No reserve), 남김이 없이 모두 바친다. 실크 로드로 갔던 이슬람 문화가 많이 자리 잡고 있었을 때의 윌리엄 볼드는 이집트 카이로를 떠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게 됐습니다. 극에서 위생 비 위생적이지요. 한센 병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윌리엄 볼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은 척수막염이 걸려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책에 이러한 글을 써놨습니다. 노 리트릿(No retreat), 후퇴하지 않겠다. 한 달 뒤에 25살의 나이에 결국 윌리엄 볼드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성경책에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실렸습니다. 노 리트릿(No retreat), 노 리그렛(No regrets), 노 리서브(No reserve), 마지막에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그의 어머니는 한센 병 환자들을 위해서 복음 병원을 차려줍니다. 복음병원은 현재 제2 인민 병원으로 이름이 바꿔졌습니다. 윌리엄 볼드는 기린은 작은 역사관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부호의 자제로서 태어난 남부럽지 않은 편안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던 윌리엄 볼드는 자신의 모든 기회, 권리, 소유, 즉 자기 자신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치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남긴 말처럼 노 리서브(No reserve)-남김없이, 노 리트릿No reserve)-후퇴 없이, 노 리그렛(No regrets)-후회 없이, 그 수첩에 적어놓고 실천해 옮겼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노!라고 말하고 예수님에게는 예스! 라고 말을 하면서 살아온 울리엄 볼드, 그가 세상을 떠나 이집트에 있는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며 형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속에 열정이 불타오르며 소망으로 기뻐하고 고난을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와 교통하다가 세상을 떠났느니라.”
 
-참 하나님께 그만큼 바칠 수 있는 윌리엄 볼드를 보면서 오늘 내가 사는 삶이 어떠한 삶인가? 이 교회가 대한민국의 아니 전 세계에 이상적인 교회가 되고, 한국에 있는 많은 교회가 사랑의 교회를 본받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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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7월 8일 (853)


1. 금리가 낮은 일본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다른 나라의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투자 방법은?
① 사무라이 본드
② 엔 캐리 트레이드
③ 와타나베 부인
④ 갭 투자

2.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인덱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화폐는?
① 유로
② 엔
③ 파운드
④ 위안

3. 2006년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4개국을 중심으로 설립된 신흥경제국 연합체는?
① FTA ② BRICS
③ IMF ④ WTO

4. 유가증권시장, 코스닥시장 등에 상장되지 않은 주식을 가리키는 말은?
① 테마주 ② 동전주
③ 대장주 ④ 장외주식

5. 한국 원화와 직거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통화 환율을 계산할 때 달러화를 기준 삼아 간접적으로 계산한 환율은?
① 재정환율 ② 고정환율
③ 변동환율 ④ 실효환율

6 다음 중 부동산 거래세로 볼 수 있는 것은?
① 취득세 ② 부가가치세
③ 상속세 ④ 주민세

7. 다음 중 주식시장의 가격 급변동으로 인한 충격을 막기 위해 운용되는 제도는?
① 불마켓 ② 어닝쇼크
③ 사이드카 ④ 펀드런

8. 프랑스의 한 타이어 회사가 1900년대 초부터 발행한 식당 정보지로, 맛집 평가에서 세계적 권위를 얻게 된 책은?
① 론리 플래닛 ② 미슐랭 가이드
③ 르 몽드 ④ 그린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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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중앙은행 무용론'…왜 나오는 걸까?



세계경제의 향방을 결정지을 변수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하 여부가 가장 먼저 손꼽힙니다. 선진 각국의 기준금리는 최근 1~2년 새 고공 행진을 끝내고 하락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이른바 피벗(pivot, 금융정책의 전환)이란 흐름이죠. ‘세계의 은행’ 소리를 듣는 Fed가 여기에 동참하느냐 마느냐는 지구 반대편 한국 가정의 소비와 저축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금리인하와 관련된 Fed 입장은 모호하기만 하고, 듣기에 따라선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달 12일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직후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까지 내려오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일밖에 지나지 않은 지난 2일, 유럽중앙은행(ECB) 주최 포럼에선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우리의 목표 수준으로 되돌리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온도차가 느껴지는 평가를 했어요.

올 초만 해도 Fed가 금리를 세 차례 내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지금은 오는 9월 한 차례 정도만 금리를 내릴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Fed가 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눈치만 본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럴 거면 Fed가 왜 필요하냐는 무용론(無用論)까지 쏟아집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4·5면에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앙은행 최대 임무는 물가와 금융 안정
민간에서 출발한 미국 Fed, 더욱 독립적


미국 중앙은행(Fed)에 대한 이해를 늘리려면 먼저 중앙은행의 필요성과 태동 과정, Fed 설립의 특징 등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중앙은행의 주요 임무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정부의 은행’에서 ‘은행의 은행’으로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지는 ‘중앙은행이 없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라는 물음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만약 중앙은행이 없다면 각 시중은행이 저마다 돈(은행권)을 찍어내야 합니다. 은행마다 경영 상태와 신뢰도가 달라 이들 은행권을 교환하기 쉽지 않고, 통화 질서에도 큰 혼란이 생깁니다. 외국과의 교역은 물론, 외환시장이 작동하기도 어렵습니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려 해도 국채 발행을 떠안아줄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법정통화(법화, fiat money)를 독점 공급하는 중앙은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중앙은행의 모태는 17세기 유럽에서 등장합니다. 1694년 민간은행이던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은행권을 표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습니다. 영국 정부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했는데, 국채를 사들인 사람에겐 이를 영국은행 주식과 교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국채를 발행해 영국은행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단일 은행권을 찍어낼 수 있게 해준 겁니다. 이렇게 ‘정부의 은행’이 된 영국은행은 은행 간 지급결제까지 기능을 넓혀 ‘은행의 은행’이 됐고, 1946년엔 국영은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미국 Fed는 한참 뒤늦은 1913년에야 창설됩니다. 프랑스(1800년), 독일(1876년), 일본(1882년)보다도 늦었죠. 이는 자유와 분권에 대한 열망이 강한 미국 사회의 전통 때문입니다. 미국 내 각 주에는 이미 인가받은 은행이 많았는데, 연방 차원에서 은행감독권까지 갖는 중앙은행을 설치하는 것을 반길 리 없었죠. 일정한 요건만 맞추면 어떤 은행이든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자유은행업(freebanking) 시대’가 20세기 초까지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1907년 증시가 급락하면서 ‘트러스트’라는 이름의 신탁은행들의 대출 자산이 급속히 부실해지고 연쇄 도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 뉴욕 월가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 건전한 은행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며 다른 유력 은행가들과 긴급 회동해 구제금융을 갹출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경험에서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할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2개 연방준비은행을 기반으로 Fed를 설립합니다. 민간에서 만들어진 Fed는 정부로부터 좀 더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의장은 ‘경제 대통령’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습니다.

미 Fed, 고용안정에도 중점

그러면 현대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는 뭘까요? 한국은행법 제1조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한은의 목적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침체될 때는 통화공급을 늘려 경기를 살리고, 경기가 과열되면 물가가 오를 수 있어 돈줄을 죄어야 합니다. 이렇게 통화량을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기준금리입니다. 중앙은행은 물가가 오를 것 같으면 금리를 올리고, 반대의 경우 금리를 내려 투자와 경제활동이 활성화하도록 합니다.

요즘 들어선 중앙은행이 고용안정, 즉 안정적 경제성장과 관리에도 많은 역할을 하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가 창궐하던 3~4년 전 한은법의 목적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법안 발의가 이어지기도 했죠. 미국 Fed는 연방준비법에서 ‘최대고용’ ‘물가안정’ ‘적정장기이자율’ 등 세 가지를 설립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합니다. 호주도 완전고용 유지를 중앙은행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선진국 중앙은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금리를 주요 정책 수단으로 삼는 중앙은행에 고용안정 임무까지 부과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중앙은행이 정부 정책에 끌려다니는 문제를 낳을 수 있죠. 그래서 영국의 경우,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최우선으로, 그리고 고용과 성장을 하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중앙은행의 태동 과정을 국가별로 살펴보자.
2. ‘은행의 은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공부해보자.
3. 중앙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독립적 의사결정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자.


"뒷북 대응 일관"…美 Fed에 잇따르는 비판
달러 스마일, 트럼플레이션이 어려움 더해



미국의 금융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는 중앙은행(Fed) 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입니다. Fed 이사회 이사 7명, 연방준비은행장 5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되는 FOMC는 6주에 한 차례씩, 1박 2일에 걸친 회의를 열어 기준금리 결정, 향후 금리정책 방향 제시(foward guidance)를 합니다.

위원들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이지만, 비판도 적지 않게 받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두 밀턴 프리드먼도 오락가락하는 Fed 정책의 문제점을 꼬집어 ‘샤워실의 바보들’이라 맹비난했죠.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온다고 뜨거운 물을 확 틀었다가 너무 뜨거운 나머지 다시 찬물로 급하게 꼭지를 돌리는 장면에 비유한 겁니다. 경제 상황에 면밀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냉탕·온탕식으로 대처하는 아마추어에 머문다는 얘기죠. 프리드먼은 저서 <미국 화폐사, 1867~1960>(1963년)에서도 “중앙은행이 대공황을 키웠다”고도 했습니다.

트라우마 된 Fed의 두 가지 실책

이런 유의 Fed 비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풀면서 물가상승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Fed는 이를 일시적 현상이라 보고 금리 인상을 미뤘습니다. Fed는 물가상승률이 8%까지 근접한 2022년 3월에야 제로금리 정책을 변경하고 금리를 올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미국 통화정책 역사상 최대 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피벗(금리정책 전환), 즉 금리 인하의 필요성이 1년 반 전부터 제기됐는데, 아직도 Fed는 서두를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지난달 FOMC 회의 때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더욱 ‘신중 모드’로 돌아섰습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정책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확신을 얻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Fed의 금리정책 역사 속 두 가지 실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1929년 미국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하자 당시 매리너 에클스 Fed 의장이 금리를 내렸는데요, 이후 물가가 오르자 이번엔 금리를 급하게 올렸습니다. 문제는 이 결정이 대공황을 재촉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프리드먼의 비판과 같은 맥락이에요, 이를 ‘에클스 실수’라 부릅니다. 2년 전 Fed가 금리 인상에 주저한 것은 아마 에클스 실수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당시 폴 볼커 Fed 의장이 스태그플레이션(경기하강 속 물가상승)을 맞아 금리를 연 17%까지 올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물가가 잡힐 기미가 보이자 너무 급하게 금리를 내려 물가가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볼커의 실수’입니다. Fed가 피벗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데는 볼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 높아지는 트럼플레이션

달라진 경제 상황이 금리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호황일 때뿐 아니라 불황일 때에도 달러가 강세를 띤다는 ‘달러 스마일(dollar smile) 이론’이 그런 예를 보여줍니다. 이는 달러 가치가 ‘불황 때 강세, 중간 지점일 때 약세, 호황일 때 강세’를 보여 마치 웃음 짓는 모양이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호황일 때 경기 과열을 막으려고 미국 금리를 올리면 강달러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경기가 악화할 때 달러화는 강세 기조로 돌아섭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때 정부가 돈을 많이 푼다고 해도 금리 인상을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자칫 달러 가치 상승세에 기름을 부을 수 있고, 국제수지 적자 등 문제를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이죠.

다음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 중국 등의 수입품에 관세를 대폭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는 것도 금리 인하 결정을 주저하게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수입관세 증대로 인한 물가상승, 즉 ‘트럼플레이션(trumplation)’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는 피벗 결정이 자칫 물가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고용시장 강세로 인해 여간해선 물가가 낮아지지 않는 ‘끈적끈적한(sticky) 인플레이션’을 경험 중인 미국 내 경제 상황도 금리 인하를 어렵게 합니다.

NIE 포인트
1. 미국 Fed의 체계와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 Fed가 금융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역사를 공부해보자.
3. 트럼플레이션이 세계경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각국 정부가 이를 어떻게 협력하고 풀어야 할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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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7일)-성찬식(聖餐式)
제목: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예수님은 누구신가? ⑮번째
말씀: 요한복음 6:33~4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권진우 부목사님
사회: 이기호 부목사님(1부)
헌금송: 홍혜천 집사(소프라노)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
 
*요한복음 6:33~40,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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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을 앞에 놓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15번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이 7월 첫 주일이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이 시간에 출입해 주시는 시원한 생수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오늘 요한복음 6장을 펼쳐 놓았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인데 누구는 그래요. 보리떡 5천 개하고 물고기 2천 마리를 가지고 5명을 먹였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지고 그 표적 이후에 오늘 예수님의 그 자기 선언, 제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구약을 통하여 또 지난번에 많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이 나는 누구다. 라고 하는걸 ‘에고 에이미’, 헬라로 I am, 나는 누구다. 예수님 당신의 자기 선언,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말하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시니 그럴 때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다. 아시지요? 그것도 모르면 안 되죠. 그다음에 나는 선한 목자다 아시지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은 목자의 심정을 다 아는 분들이니까. The Shepherd heart. 나는 선한 목자다. 그러니까 나는 생명의 빛이다. 이런 것들을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라고 하는데 이제 앞으로 좀 다룰 터인데 오늘 첫 번째 주님께서 에고 에임이 자기선언하신 것이 뭐냐면, 오늘 나는 생명의 떡이다.
 
I. 나는 생명의 떡이다.
-그래서 이 생명의 떡이 예수님의 당신 자신의 강력한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 생명의 떡 문제를 여러분들이 해결을 잘하면, 그가 줄이지도 아니하고 오늘 35절에, 오늘 요절인데요. 뒤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멘 생명의 떡 문제와 그다음에 목마른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생명의 떡의 문제는 오늘 다루게 될 것이고. 여러분 다음 7장에 가면 ‘너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 거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거예요. 앞에 4장에서도 그 수가성 물가의 예수님과의 말씀하실 때, 생수가 곧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떡의 문제와 말씀의 떡의 문제와 생수의 문제 성령의 역사가 서로 선순환이 되는 거예요. 둘 다 서로 같이 톱니바퀴처럼 같이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생명의 떡을 위하여 주님 먼저 영적 시각 교정을 해주시는데, 뭐라고 교정을 해주시는가 하면 사람들이 오늘 이 주님이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배경은 뭐냐 앞에 배경이 이래 나와 있어요.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신 기적 같은 사건이라니까, 우리가 주님만 제대로 따르면 이 삶의 방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떡의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뭐가 해결된다고요. 떡의 문제 빵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떡의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그래서 주님만 따르면 무한정 먹을 수 있겠구나, 그래서 주님을 무료 급식소 소장으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영의 눈을 못 뜬 거죠. 왜냐하면, 떡을 자꾸 먹어도 더 배고프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야 하루 종일 굶었는데 주님 이렇게 우리의 굶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니,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니, 우리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자. 그리고 제 얘기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15절에 뭐라고 나왔냐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15,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육신의 떡 문제, 우리 주님은 육신의 떡 문제를 오늘 해결해 주세요. 육신의 떡 문제 등한시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경제의 문제도 주님은 관심이 있으세요. 여러분 주님을 잘 따르면 특별한 훈련을 위하여 아주 고단수의 아주 바울 같은 이런 사람들 제외하고는 웬만하고는 하나님 여러분들의 경제 문제, 떡 문제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저는 어릴 때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 아들이었기 때문에 저희 제 부친교회 근처 개척교회 옆에 보면 다 하루살이 노동자들 정말 못 사는 사람들만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삶이 맨날 술 마시고 그냥 가족들 폭력 행사하고 이런 남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가지고 삶이 정리가 되니까, 반듯하게 사니까 경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에요.
 
그게 참 보험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주님 우리 떡 문제도 해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의 떡을 해결해야 되는데, 무슨 예수님을 요술방망이처럼 삼아가지고, 잘못된 시각 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26절의 앞에 뭐라고 하시냐면,
 
*요한복음 6:2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잘못된 시각을 고쳐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뭐하지 아니할 것이오. 줄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뭐예요? 목마르지 않는다.’ 근데 주님은 하루 먹고 또 배고프고 이런 것 정도 문제가 아니라 주님은 생명의 떡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진짜 영적인 고갈 상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제자 훈련하는 교회고, 점점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되기를 우리가 소원하는 교회인데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이런 과정을 신학적으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래서 성화예요. sanctification,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러는데 이 성화의 과정에 대해서 저 나름 또 다른 정의를 내린다면 성화라는 것은 육신의 떡을 의지하는 수준에서 점점 더 생명의 떡을 의지하는 과정이다.
 
“성화는 육신의 떡을 의지하는 수준에서 점점 더 생명의 떡을 의지하는 과정이다.”
-육신의 떡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떡은 그래서 여러분, 참 이 인류의 역사는 아담이 불순종을 선악을 알게 한 나무를 먹는 걸 따먹는 걸 가지고 문제가 시작돼 가지고 영원한 파멸로 갔어요. 그러니까 제일 첫 번째 아담을 통하여 먹는 것이 잘못돼 가지고 파멸로 갔는데,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께서 오늘 생명의 떡이 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실 것이에요. 떡의 문제를 진짜 떡의 문제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 시각 교정을 해야 되는데 오늘 꼭 필요한 거처럼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생명의 떡이 되셨다. 하는 그 말은 어떤 뜻인가 오늘 37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요한복음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결코 내 쫓지 아니하리라. 오늘 성찬을 앞에 놓고 오늘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늘 이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다.”
-오는 자는 결코 내가 내쫓지 아니하리라. 거절하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초청 우리 주님은 초청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선한 목자이세요. 근데 사탄은 내 쫓고 참수하고, 거절하고 밟아버리고 아주 못돼먹었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오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거절하시지 않으시는 주님의 그 복음 중에 복음 앞에 우리가 눈물이 나고, 감사가 되고, 정말 치밀어 오른 은혜가 우리 속에 새로워져야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 시대는요 거절의 사회에요.
 
저만 하더라도요. 중학교를 시험 봐가 들어갔다니까 중학교 입시가 3대1, 4대1, 5대1, 이었어요. 그러면 하나만 남고, 나머지 3대1, 4대1, 이면 나머지 3배, 4배가 다 거절당한 것 아니에요. 고등학교 입시는 더 치열했죠. 대학입시도 치열했죠. 요즘도 대학입시 어떤 과는 10대1, 20대1, 되는 거예요. 뭐 하나 들어가면 나머지 9, 하나 들어가면 나머지 19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대로 된 회사는 다 안 받잖아요.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중등, 고등학교 대학, 회사에서 거절당하는, 내가 이러니까 목사님 영업 사원은 매일 거절당합니다. 우리가 태신자를 품고 전도할 때도 거절당할 때가 있죠.
 
어떤 형제가 마음을 먹고 어떤 자매에 대해서 필이 꽂혀갖고 유아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 그러면서 꽃다발을 들고 자매에게, 자매 나를 받아주소서. 라고 했는데 그 자매가 나는 형제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애요. 이러면서 단칼에 거절하는 거예요. SNS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거절당한 경험 있죠. 단톡 방에 있는데, 혼자 남겨주고 다른 방을 만들어 가지고 거절시키는 거예요. 차단을 해 가지고 거절당한 경험입니다. 남편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아내로부터 거절당하고 그래서 이 사회가 소사이어티 오브 거절, 이런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절의 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는 상처가 너무 많고 천년, 2천년, 이 한반도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경쟁 하다 보니까, 30프로는 무조건 있죠. 30프로는 무조건 이쪽 누가 말해도 들어먹질 않고 서로가 그냥 뭐 몸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싸우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상처가 많아서, 누가 뭐래도 말을 안 듣는 30프로, 30프로 의심과 불신과 거절의 트라우마가 많은 사유가 오늘 생명의 떡의 역사를 체험하면 이 성찬회를 받으면 거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늘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39절에 눈물이 핑 돌아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39절 본문에,
 
*요한복음 6:39,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에, 말씀의 바다에 나를 풍덩 던져 보니까, 39절을 깨닫게 하시는데 나를 보내신 주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 주님의 부활의 몸으로 같이 살도록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래서 주님으로 지금 한번 뒤에 보니, 요한복음 6장 28절에,
 
*요한복음 10:28,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II. 생명의 떡으로 먹으라고 하신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건물을 지을 때, 남쪽 타워, 북쪽 타워 중간에 요셉 브릿지가 있는데, 주님의 손을 안아 가지고 여러분 멀리 봐야 보여요. 그게 루버로 해 가지고 예수님의 손으로 이거 안았어요. 남쪽 타워, 북쪽 타워 건물을 안았어요. 그리고 그 안을 때 거기에 루버에 십자가가 많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안아주시는 본당 자체가 그러고, 여기서 사랑 글로벌 광장에 천여 평이 다 사람들이 거절한 누구든지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거기에 안영남 작가의 포에버 러브라고 거기에 소나무 옆에 여기 있어요. 붉은 심장이 있어요. 24시간 내내 벌떡벌떡 LED가, 또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전기 값 갖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죠. 똑같애. LED라서 비싸지도 않어요. 예 LED 할 돈 따로 있고, 구제할 돈 따로 있는 거예요. 제발 좀 편협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보고 제발 좀 비판하지 말고, 거절하지 말고, 우리 주님이 교회 누구든지 거절 감을 느끼지 말게 하시고, 교회 와서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 그런데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이 사회에서 거절당하고, 왕따 당하고, 추방당하고 단톡방에서 차단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교인 줄 믿습니다. 문제는 그런데 문제가 되죠.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는데 세상의 떡에 취한 우리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에요. 참, 아이러니한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그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시는데, 세상의 떡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 이 말씀을 설교를 하셨거든요. 오늘 요한복음 6장에 설교하셨는데 요한복음 6장,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보포면 빨간 글씨로 돼 여기 빨개요 아 한 페이지가 다 빨개요. 계속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그런데 주님이 이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66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거절하고 다 떠나가 버렸어요.
 
*요한복음 6:66,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절하면 되겠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떡에 취해 가지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외면함으로 영혼의 굶주림과 귀가를 계속 갖는다면 되겠습니까? 심지어 배신한 사람들 있어요. 7절이라고 하니까, 가롯 유다 같이,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은 거절하지 않으신 주님을 믿습니다. 다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는 우리 삶의 현상 가운데서 주님 오늘 우리를 거절하신 주님의 품으로 나를 던집니다. 그다음 또 하나 깨달을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떡을 먹게 하시므로 거절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의 생명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뭐냐면 생명은 좀 추상적인 용어예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어떤 이론적인 것이에요. 철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생명의 떡은 먹어야 되는 거예요. 생명의 떡은 체험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성찬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체험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떡을 구체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늘 본문 뒤에 53절에 보니까, 여러분 읽었습니다마는
 
*요한복음 6:5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말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게 좀 54절에 보니까,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주님의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리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을 말씀하고 그러니까 이제 55절에 다 같이 시작,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은, 내 피는 놀라운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데, 60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그러냐,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 야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이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오늘 이 말씀이 어렵도다.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귀를 쫑긋 세우고 제 말씀 앞에 같이 요한복음 6장의 세계에 다시 우리가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비슷한 느낌이 있을 수 있는 분들은 어떻게 주름에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지 제자들처럼 오늘 어리버리하게 못 알아듣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깨닫는 영적 시각 교정,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피지컬 예수님의 바디와 예수님의 피를 먹는가, 그 정도 아니에요. 영적으로 먹고 마셔야 되는 것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어느 날 엘리야가 선지자가 로뎀나무 밑에서 이제 번 아웃 돼 가지고 나의 생명을 취해 달라고 완전히 고갈 상태가 됐어요. 그때 누가 보냈었어요. 그 로뎀나무 밑에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 천사가 준 떡과 물을 먹고 마셨는데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로뎀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 밑에서 오늘 생명의 떡 대신 예수님을 깨닫고 생수를 먹고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만찬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체험해야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바울이 이걸 잘 깨닫고 난 다음 고전 11장 26절에,
 
*고린도전서 11:26,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자, 오늘 주님의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인데 이 뜻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뭐라고 얘기하느냐 바울이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무슨 말이냐? 주의 죽으심의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깊은 신비와 비의를 오늘 이 자리에서 더 깊이 깨달을 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십자를 더 깊이 묵상한다. 할 때, 이번 주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에드워즈 테일러라는 18세기 청교도 목사님이시자 시인이었던 그분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깨닫는 거에서 아 너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마음에 그냥 막 그냥 전율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가 뭐라고 말씀했는가, 이렇게 말씀했어요.
 
“하나님은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갈고 반죽해서 생명의 떡을 만들었다.”-에드워즈 테일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갈고 반죽해 가지고 이 생명의 떡을 만들었다.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으깨고 반죽해서 만들어진 떡이 생명의 떡인 줄 믿습니다. 그리 생명의 떡을 먹으라는 것은 이 십사가의 깊은 은혜와 신비를 오늘도 기억하고 확인하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 모두는 생명의 떡을 먹게 되는 것이고, 거절의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53절에 다시 한 번 ,
 
*요한복음 6:5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수많은 상처 입은 분들, 슬픔 당한 분들, 극한 거절로 고통당하는 분들, 이분들 계시면 십자가를 통하여 아들을 갈고 반죽해서 몸을 으깨어져 떡을 만드시고 그걸 통하여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을 우리가 묵상하고 체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상처가 치유되고, 거절이 해결되고, 슬픔이 극복되고, 우리 가운데 수없이 거절당하고, 공고한 인생이고, 먹어도 배고픈 인생이고, 어려움의 파도가 몰려올 때는 숨을 자리가 없고, 슬픔에 강이 범람(汎濫)할 때는 안전하게 있을 데가 없고 실패할 때마다 가슴을 쉬는데도 쉴 데가 없는 그런 우리 삶의 상황이 있다면, 오늘 생명의 떡을 먹고 소생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깊은 신비를 깨닫는 것이에요. 제가 젊을 때,
 
♬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지친 언덕길 오 나의 주님 나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죄인 위해 권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우리의 생명 죽게드리네. 나의 자랑 십자가일세. 나의 생애 주님까지 나의 영광 나타내 주소서 이 세상에 생명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신비가 우리 모두에게 눈이 열리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빠져도 십자가 앞에서 자빠져야 됩니다. 생명의 떡을 오늘 먹는다는 것은 으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깊이를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진리예요. 그리고 생명의 떡이신 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초림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그 어느 날 완벽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5절-16절에 우리 크게 또박또박 같이 합동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15~16,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다시 확인한 생명의 떡을 너희들이 제대로 먹게 될 때, 결국은 다시는 영적으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 않은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계산으로만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떡의 문제는 수학적이거나 계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생명적이고 하나님 적이고 천국적의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제 성찰 앞에 놓고 적용하겠습니다.
 
적용.
35절 요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크게 우리가 읽고 고백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내게 뭐에요? 오는 자는, 주님은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초청의 전문가라 그러셨죠. 주님께 가는 자는 상처받아갖고 도망가지 아니하고 생명의 떡 되시는 주님 오라 그러시는데 세상의 떡에 취해 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거절하는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그런 부분이 있다면 주님 주님께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내게로 오라. 주님 앞에 나간다는 이 말씀은 마치 불이 난 집의 창가에서 이제 불타 죽기 직전에 겁에 질린 자식에게 밖에 있던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살리려고 밑에다가 안전장치를 다하고 얘야 뛰어내려라.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라고 애절하게 외치는 그 부모의 심정과 같아요. 여러 나라를 사막에서 헤맨 후에 탈진해서 거의 죽어가고 있는 자를 발견한 구조대가 이거 마시세요. 탈진해 죽어가기 직전인 사람에게 이거 마시세요. 라고 말하면서 물을 주는 거와 같아요. 불타는 집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물마시라고 하는데도 안마시면 갈증으로 죽는 것이에요. 오늘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깨닫고 오라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의 몸을 갈고 으깨고 이렇게 하신 것, 그분 앞에 우리가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내 생애를 통하여 주님 앞에 생명의 떡을 먹고 주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으깨어 주셨으니 우리도 헌신하고 우리의 삶을 들일 때 그게 진짜 축복이요. 그게 진짜 은혜가 되는 겁니다.
 
♣요약
우리는 목마를 수밖에 없는 떡의 전쟁터에서 돌아와 ‘거룩한 성찬’을 받을 때,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영적 굶주림을 해결하여 주셔서 참된 만족을 누리며 예수님께서 친히 갈리고 으깨어진 생명의 떡이 되어 주셨사오니 거절 사회에서 받은 패배감을 온전히 치유 받아야 한다. 우리도 가정과 일터에서 으깨어진 생명의 떡이 되어 예수님의 피의 복음의 능력에 의지하여 ‘2033-50 비전’을 올려 드릴 때, 한국교회와 세계 복음주의 교회와 함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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