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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6년 1월 25일)-로마서 강해(1)
제목: “로마서의 산에 들어가십시다”
말씀: 로마서 1:1-15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1부)
대표기도: 이지형 부목사님 (1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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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1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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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부터 로마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로마서는 기독교의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진리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로마서를 성경의 다이아몬드다. 그 이유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가장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세공된 말씀입니다. 오죽하면 신약을 압축하면 로마서가 된다 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소화하여 저와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역사에 거대한 흐름을 거시적 관점에서 매크로 하게 또 미시적 관점에서 마이크로 하게 소화하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4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을 보여주었다면 로마서는 예수님의 복음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강력한 해석이 얼마나 큰 설득력이 있었는지 당대 그 당시는 그레코 로만, 특별히 그리스 로마, 그리스 헬라적 사고방식 철학과 모든 사상이 헬라적인 것이었는데. 헬라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서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로마서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도 이 생각의 혁명과 삶의 혁명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갑자기 앞에 너무 거창하지요 예 그래서 오늘 제가 이 로마스 강의를 지난번에 서론 격으로 함하고 난 다음에 우리 교회 다라방 다라방마다 목사님 이번에 우리 다락방에서 로마서를 10번 읽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그렇지 한 달에 한 번씩 읽으면 12번 읽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로마서를 여러분 앞으로 쳐도 뒤로 쳐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 영안을 열어주시고, 또 로마서를 여러분의 생애 말씀의 양식으로 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설교의 제목을 "로마서의 산에 들어가십시다." 그렇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설악산에 간다 그랬을 때에 설악산에 갈 때 어떻게 갑니까? 그냥 갑니까? AI를 또 혹은 이렇게 인포메이션 보면서 설악산에 대한 SNS 통화의 지식을 듣고 그렇게 설악산에 가죠. 저는 39살 때까지 설악산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나중에 39살 때 설악산을 갔는데 제가 생각하던 설악산하고 다르더라고요.
가보니까 가니까 설악산에 여름에는 비선대 물에 발을 담글 수 있고 가을은 단풍이 너무 아름답고 겨울에 지금은 눈이 참 특별하잖아요. 실제로 본 설악산은 제가 알고 있는 설악산과 달랐다는 것이에요. 마찬가지예요. 실제로 본 로마서의 산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옛날에 생각하던 로마서의 어떤 나름 알던 로마서의 나무, 로마서의 폭포가 아니구나 라는 깨닫게 될 겁니다. 지금 말한 대로 설악산의 여름, 겨울 혹은 가을을 이렇게 다른 것처럼 제가 보면 얘기하는 게 봄은 한 번도 안 가봐서 그래요. 이번에 제가 여러분 부탁드린 것은 로마서 시리즈를 하는 동안에 여러분의 삶에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직접 로마서라는 산에 등장하셔야 돼요.
들어가면 첫 번째 먼저 깊고 높은 신학의 봉우리를 만나게 될 겁니다. 뭐에 봉우리를 만난다고요? 신학의 봉우리, Thealage, 또 인생의 감동과 변화를 주는 아름다운 꽃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슴 뛰는 선교의 폭포도 만나고 또 우리에게 수많은 신뢰를 주는 동력자 들을, 동력자 들이라는 튼튼한 바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시원하게 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눈도 만져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이전의 선입관을 버리고 로마서의 산에 제대로 들어가면 혁명적 삶이 혁명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I. 로마서의 산에 제대로 들어가면, 혁명적으로 삶이 변화된다.
-우리가 로마서의 산에 들어가서 혁명적으로 변화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로마서의 산에 들어가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인격과 마주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와 마주친다고요? 인격을 마주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특별하게 인격성에 대해서 예수님의 인성이라는 인격 예수님의 신성이라는 인격에 대해서 아주 신비한 건데 이걸 만나게 되는데 먼저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 그로서의 인격성에 대해서 이렇게 명료하게 말씀하는 2절에 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구약에서 미리 약속하신 분으로 구약에 뿌리를 둔 분이에요.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세요.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세상에 어떤 종교 지도자도 이런 주장을 못 하는 것임 할 수도 없습니다.
인격을 가지신 예수님만이 이런 예언을 하시고,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독보적인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기에 대한 증명을 하겠습니다. 먼저는 3절에 보니까,
*로마서 1:3,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님은 그의 아들에 관해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그러니까 인성을 지니신 인격자이시다. 그다음에 4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느냐,
*로마서 1:4,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신성을 가지신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구약에 선포된 미리 선포된 것 독보적이시고 그 다음에 인성과 신성을 가진 인성과 신성을 가진 인격적인 분이시다. 다윗의 자손으로 인성을 가지시고 그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능력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니까 인성과 신성이 결합된 독특한 인격성을 갖고 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걸 언제 깨달았는가,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말을 타고 가다가 거기서 거꾸러져 가지고 하늘에서 빛이 나오는데 하늘에서 빛이 나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성을 경험하면서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다. 인성을 지신 음성을 가지고 소리를 들었어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도 바울은 만나게 된 거예요.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면 바울처럼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라는 것이에요. 기독교의 독특성은 뭐냐면 인격성인데 만일 예수님을 추상적인 신성이나 도덕적인 이상 정도로만 축소하면 복음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념에 불과하게 되는 거예요.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추상적인 사상이나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에요.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에요. 오죽하면 인격성의 이 친밀한 관계를 뒤에 로마서 8장 15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느냐,
*로마서 8장 15절,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인격의 관계가 양자영 자녀가 되어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뭐라고 부른다고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실 정도로 여러분 자녀와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란 이건 뭐 뭘 말할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 아닙니까?
아빠 아버지라고 자녀가 부모 부모와 맺는 가장 친밀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자녀의 관계인데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교류적인 세계나 도덕 원리로만 이해한다면, 신앙은 이념과 사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시는 고통을 공감하시는 인격 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식히시는 겸손과 온유의 인격임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이 순종하는 인격,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인격, 따라서 우리는 이 인격적인 예수님을 교제하면 이 믿으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오늘 바울 사도도 이 주림을 신성과 인성으로 만나게 되니까. 그의 야비하고도 사람을 때려 죽이고 스바를 때려 죽이는 그런 인격이 얼마나 놀라운 인격으로 변하느냐, 5절 뒤어 보니까, 예수님을 순종한 인격이 되게 하시고, 또 9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냐면요.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은 인격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할 정도의 인격자로 이렇게 성숙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제가 이렇게 좀 거창하게 처음에 예수님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강조한 이유는 뭐냐 하면 만약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인본주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면 예수님의 사역을 심지어 부활조차도 상징적인 사건으로만 개념화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속에 인간적인 사상이 확장되는 거예요. 인간적인 지식만이 확장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인격성을 약화 시키고 와해시킬수록 인간의 사상과 생각이 더 많이 개입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사탄의 기가 막힌 전략인 줄 믿으시기 바라는 것이에요. 이 좀 어렵지만 이제 제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인격성, 인격 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인격이신 예수님과 만나게 되면 인격자이신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삶이 지배당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들의 어떤 자유주의 신학, 자기들에 대한 신학, 자기들의 사상, 자기들의 최악을 더 강조해야 되는데 예수님의 인격과 만남은 그분이 주인이 되시면 그분 앞에 우리가 왕자를 내어드려야 되는 것이에요. 왜 다들 가만히 계세요? 예수님을 참된 인격으로 만나면, 그분 앞에 우리의 왕좌(王座)를 내어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유주의자들이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이념이 자기들의 어떤 관념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강조. 강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격성보다 예수님의 사상 이걸 더 강조하는 것이에요. 오늘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심지어 극단적 보수도 마찬가지예요. 자기들의 생각 변할 마음이 없어요.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면 극단적이 될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인격으로 오시면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추상화하고 어떤 주의, 어떤 이즘, 어떤 주의로만 두게 되면 나는 여전히 내 삶의 왕자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인격성을 거부하는 겁니다. 여기서 인본주의 신학이 나온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극단적인 보수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보수주의자예요. 저는 아주 사상적 신앙도 아주 보수입니다만.
극단적인 보수는 누구 말을 들으려고도 하잖아요. 다시 한번 인격의 기원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삼위 하나님이란 삼위격, 삼위의 격이란 삼위의 인격을 갖고 계시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인격, 성자, 예수, 그로서의 인격, 성령의 인격, 성령도 인격이에요. 삼위 인격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 자체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신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신성과 인성을 통한 신비한 인격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우리 인격이 손상되고 훼손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 놀라운 신비한 인격을 접하게 되면 훼손된, 오염된, 우리의 잘못된 우리의 많이 찢어진, 많이 상처받는 쓴 뿌리가 된 이런 인격들이 회복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인격을 만나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죽음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신성을 통하여 죽음도 극복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인성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눈을 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으로 나와 같은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신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고난과 고통이 나를 옭아매는 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인격과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이 오히려 회복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태생적 혹은 후천적인 약점과 어려움에 얽매이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인격을 만나면, 소위 이미 결정된 거 가지고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도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약점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약점을 공감하시기 때문에, 나의 문제의 짐을 지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걸 믿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부터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수많은 과정들이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10분의 1, 100분의 1도 감히 순종하기 힘들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신비한 신성을 지닌 인격 그리고 주님의 인성을 지닌 그 인격과 접하면서 주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면서,,주가 나와 동행을 하며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도다. 그걸 하게 되니까. ,♪~~
수많은 약점과 부족함이 있었지만 인격자이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님이 예뻐해 주시고 가만히 계시죠? 주님이 예뻐해 주시고,,, 여러분 다 그렇게 될 수가 있는 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다시요.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인격을 접하게 되면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수많은 약점과 단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극복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네, 연세드신 분들은 내가 어떻게 죽나? 내가 어떻게 되나?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그런 분들을 그런 분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의 인격과 부딪치게 될 때에 자유하게 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이것 때문에 하늘의 신성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에요. 저는 저희 할아버지나 저희 부친이 저희 가훈을 세우실 때에,
로마서 14장 7절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걸 우리 선대부터 주님은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니까 이거 집에 가훈으로 가훈 딱 해 가지고 1, 2, 3, 4, 하는데 주제 말씀 로마서 13:7절-8절, 거기에 거기서 파생되어 가지고 빌립보서 4장 13절 바울이 깨달았던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모든 걸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초라한 존재고, 오염된 존재고 훼손된 존재고 쓴 뿌리가 있는 존재인데 그런데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이렇게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내게 능력 주신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만 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이렇게 될 때 그의 인격성을 믿을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하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면 선지 적 사도 성을 지닌 자가 되는 겁니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면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아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된다.
제가 말씀 하나를 다 풀어 가지고 이걸 결론적으로 설명을 해야 되는데 제가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 그로서의 인격과 만나면 뭐가 된다고요? 선지적 사도성을 가진 자, 이게 영어로 말하면 Prophetic Opposal Ship인데 이게 이제 여러분들 이제 지금부터 이해를 하셔야 돼요. 앞으로 로마서를 할 때 이것이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신학적 사도의 로마서의 첫 번째 신학적 고봉에 여러분들이 올라가기를 신학적 고봉과 만나는 것이 여기서 자, 그리스의 인격과 부딪혔을 때 우리가 받은 열매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도성이라는 것이에요.
주님의 신비한 신성과 인성의 인격을 만나면 모든 성도들은 사도성을 가지게 된다는 거예요. 사도 성을가질때 그 예언자적 사도 성, 어떤 예언적 또 선지 적인 미리 분별할 수 있는 앞날을 볼 수 있는 안목과 그 다음에 사도성이 갖는 어떤 철저한 실행력, 어떤 추진력 이런 걸 갖게 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가? 하면 자 1절에 보니까 바울이 이렇게 나와 있어. 뭐라고 나와 있냐면,
*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특정함을 입었으니.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바울처럼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주로 믿습니다. 예 자 이걸 좀 더 쉽게 설명을 하면 5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 뭐라고 나오냐,
*로마서 1:5,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들, 방송으로 듣는 모든 분들, 별관에서 듣는 모든 분들, 모든 SNS로 들어오시는 유튜브로 들어오는 모든 분들,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분들과 저는 우리가 안에 포함되는 줄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로 말미암아 바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는 거기에 바울과 바울과 함께하는 팀들이에요. 복음의 팀들이 그 팀들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사도의 직분이라는 말은 사도의 기능을 받았다. 정확한 번역은 사도의 역할을 받았다. 우리의 식으로 말하면 사도성을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오늘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깨달은 모든 성도들은 여러분들과 저는 우리 모두는 사도 성을 가지고 사도의 직분을 받은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도직 자체는 계승이 안 되지만, 사도성 자체는 계승이 되는 것인데 따라서 예수 그리스의 인격을 믿는 우리에게 사도성을 주신 목적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8절에 이래와 같이 나오세요. 8절에,
*로마서 1:8,
8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뭐에 전파됨이로다.
생명력 넘치는 사도성을 지닌 그리스인들을 통하여 이 그리스인들을 통하여 복음이 선포되는데 거기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는 줄로 믿습니다. 많은 한계가 극복된다는 것이에요. 이걸 이제 전체적으로 제가 크게 말씀을 드렸고, 이걸 이해하도록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늦게 쓴 성경이에요.
로마서 일찍 사도바울이 쓴 성경이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라든지 고린도서라든지 데살로니카라든지 좀 일찍 썼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다, 데살로리니가서다, 그 다음에 고린도서다 이런 성경은 바울이 거기 가서 전도를 하고 그 다음에 양육을 하고 그러면 다시 이제 갈라디아다, 이런 에베소다 이런 지역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거는 소아시아 지역인데 나중에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지금으로 말하면 그리스로 넘어갔어요. 그리스로 넘어가 거기서 막 사역을 하고 있는데, 누가 왔느냐 하면 로마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 두 사람이 그리스의 헬라 지역에서 사역을 하던 바울에게 왔어요. 그 사람 이름이 뭐냐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들어보셨죠?
프리스틸라 앤 아쿠일라스라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와 가지고 로마에서 있었던 소식들을 전하는 것이에요. 소식을 듣고 바울은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가, 고린도 교회는 이미 사역했던 그 교회를 향하여 컨펌하고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양육 편지를 하고 이런 식으로 많이 하는데, 이 로마인서 이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다시요. 가봤어요? 못 가봤어요.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브리스겔라와 아굴라의 얘기를 듣고, 바울이 예지, 예언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이 로마서를 쓴 것이에요.
따라서 이 로마서를 제대로 깨달으면, 여러분 우리가 가보지 않는 길 살아보지 않는 그 삶의 어떤 그런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사도적, 선지성을 가지고 돌파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모두가 다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대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있는 이런 우리의 인생의 현장 가운데서 오늘 이 사도적 선지성이라는 신학적 통찰을 저와 여러분이 내 것으로 아주 그냥 내 것으로 그대로 접목을 하기 시작하면, 바울이 가진 사도적 선지성을 가지고 그 모든 상황을 돌파했던 그 은혜가 여러분과 저에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확인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어요.
바울은 소아시아나, 마게도냐 지역까지 사역하는 것,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그리스 사역까지도 그것만으로 끝날 수가 있었어요. 그거라도 충분해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사도성을 가지고 복음이 없는 땅끝. 심지어 서바나 내가 서바나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리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었어요. 이것이 굉장한 돌파력이에요. 종교 개혁을 한 종교 개혁자들조차도 당시에 기독교의 순수성 이런 것들을 회복하려고 그랬지, 자기들이 있는 어떤 교구, 자기가 속한 믿는 어떤 지역 거기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을 별로 못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걸 뛰어넘는 사도적 선지성을 가지고 뛰어넘는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에요.
바울은 가본 길을 재방문해서 경고하게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가보지 않는 미래를 향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프론티어의 눈이고 가보지 않는 길에 대한 두려움과 그다음에 기대가 교차하는 상황인데 이 가보지 않는 길에 대해서 기대와 떨림에 대한 미래의 여정에 대해서 바울은 소위 선지적 사도성을 가지고 선지자의 예언력과 예지와 사도의 추진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된 그 은혜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에요. 따라서 이 시간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능력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현재 상황에 주저앉고 싶거나 그냥 내 가운 내 삶 가운데 가슴 뛰는 환상이 없다는 분들은 오늘 이 선지적 사도성을 가지고 예언적 사도성을 가지고 돌파하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 인생 후반에 한 번 내가 한 번 그래도 다음 세대에 뭔가 레가스를 남기고 싶다. 뭔가 내 인생에 ’온 땅이 물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은 여호와의 영광을 한번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로마서 산에 사도적 선지성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어제 새벽에 제가 온 교우들에게 찬송란을 가르쳐 드렸어요.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야 주 찬양해, 주찬양해 할렐루야.
이 찬송은 70년대는 갓이즈굳, 80년대는 이 찬송이 한국교회 큰 부흥의 시기에 참 특별한 찬송이었어요. 제 마음에 가슴에 불이 붙는 거예요. 하나님 대한민국 교회가 80년대 90년대 놀라운 봉을 체험한 줄 믿습니다. 지금부터 30~40년 전에 우리에게 다시 회복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마음이 생기는데 할렐루 할렐루 할 때 할렐루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지금 갈등과 분열의 상황이에요. 그렇지만 오늘 로마서를 가지고 개인도 가정도 그러고 선지적 사도성을 가지고 예언적 사도성을 가지고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이지만, 바울은 로마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영적인 계시와 능력을 가지고 이런 놀라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셨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정말 삶의 나침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어요. 여러분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그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훨씬 나아요. 아멘, 무슨 말이냐. 사도바울은 성경 정경도 없었어요. 66권 정경 없었어요. 시대적 어떤 상황과 그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이 말씀 제대로 깨달으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은혜와 능력을 우리는 그 이상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보다도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과 성령과 은혜의 환경이 더 좋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Prophetic Opposal ship, 사도 바울이 가졌던 선지적 예언성을 가지고 가보지도 않았지만, 해보지도 않은 길이지만, 심지어 개혁자들, 종교개혁자들 조차도 자기 그 테두리만 있겠다는 어떤 마게도니아 환상으로만 끝날 수 있지만, 로마까지 가겠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시대를 새롭게 한 은혜가 오늘 살아계의 모든 성도들 한 분 한 분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제 우리가 할렐루 할렐루 하면서 할렐루 할렐루는 찬양한다. 그 말이에요. 야는 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구약을 몽땅당 한편으로 딱 한마디로 말하면 할렐루야예요. 여러분 어려워도 할렐루 할렐루와 주찬양 이 찬송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에 선제적 사도성을 가지고 돌파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거에요. 그러면 이 선제적 사도성을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선제적 사도성을 가진 사람들이 적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III.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면,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아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된다.
이게 무슨뜻인가, 오늘 14절에 다 같이 한번 다시 한번 합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로마서 1:14,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뭐예요? 다 내가 비친 자라. 사실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내가 회개한 양보다도 주님이 용서하신 깊이가 더 큰 줄로 믿습니다. 내가 헌신한 시간보다 주님이 나를 위해 내어주신 생명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내가 받은 은혜는 너무 커서 도무지 갚을 수가 없구나. 이때 생기는 마음이 빚진 자의 심정이에요. 오죽하면 로마서 3장 24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함께 보죠.
*로마서 3:23,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값 없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 가지고 내가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나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받은 은혜는 너무 크고 내가 갚을 수 있는 건 너무 적고 이걸 은혜의 비대칭성이라고 제가 설명을 해보았어요. 이것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예요. 내가 하는 어떤 공로도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은혜의 비대칭성이에요. 소위 마태복음에 나오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심정이에요. 그리고 누가 보면 15장에 여러분 돌아온 탕자, 엉망으로 살다가 야 아버지 집에 가면 뭐 그래도 먹을 수가 있겠구나 싶어 가지고 돌아가는데 아버지 만나 뭐라고 얘기합니까?
허랑방탕해서 살다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컴을 받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그래도 양심은 있어 가지고,,, 예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겠어요?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우리가 잔치하자. 그 아버지의 사랑과는 비교불가, 족탈불급(足脫不及)이에요. 그때 탕자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은혜는 내가 도무지 갚을 수가 없구나. 내가 도무지 갚을 수가 없구나. 이게 은혜의 비대칭성이에요. 그러면 남은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 아버지를 더 기쁘시고 아버지를 어떻게 더 사랑할까? 그걸 생각하게 되는 빚진 자의 심정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오늘 바울이 빚진 자의 심정의 대표적이었어요. 디모데전서 1장에 보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뭐요?
*디모데전서 1:13,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폭행자였으나 우리 주위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비교가 안되는 거에요,
*고전15:9-10,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잘 알잖아요. 은혜의 비대칭성이에요. 그래서 로마서의 계속되는 주제는 내 공로는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치러주신 값은 내 능력으로는 계산 불가능, 박혜자였던 내가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소위 선제적 사도성에 눈을 뜨고 사명자가 된 것이에요. 그래서 가보지 않는 로마를 향하여 가겠다는 그 돌파하는 능력을 추진력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최근에 우리 기독교 영화 가운데서 요즘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신의악단’이라고 있어요. 그 신의 악단에 마지막이 우리 교회에서 촬영된 거 아시죠? 이게 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북한에서 NGO에게, 기독교 NGO에게 돈을 받고 싶어 하니까, 기독교 NGO에서는 그러면 기독교적인 것이 있는 걸 증명하라. 그러니 찬양단을 만드는 거예요. 그 찬양을 만드는데 박교순이라는 정치보위부 장교가 있는데, 이 장교가 책임을 졌어요. 그리고 이제 가짜로 해야 됩니까? 진짜로 해야 됩니까? 찬양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찬양도 혁명적으로 하라우! 딱 이러는 거예요. 혁명적으로 찬양하다가 뒤집어진 거예요. 혁명적으로 찬양하다가 변화됐어요.
그래서 박교순이라는 이름인데 박교순인데 사실은 거기에 메타포가 들어가 있는데, 거꾸려면 박순교야. 그리고 또 자동차 나오는데 천사예요. 천사,,, 마지막 천국에서의 예배 장면이 우리 교회 예배 장면이 나오는데 그 박교순이라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만 나가고 있잖아요. 그리고 자신은 순교하고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거예요. 아마 바울이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14절에,, 오늘 요절인데,
*로마서 1:14,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 빛진 자가 되었으니까 사도적, 선진적 사도성을 가지고 13절 뒤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이렇게 나와 있죠. 13절 뒤에 보니까,
*로마서 1:13b,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길이 막혔지만 그 막힌 길을 뚫어버리는 선지적 사도성을 확보한 은혜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 그러니까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은혜의 비대치성을 깨닫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되면 거룩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거예요. 강박관념을 갖게 되는 거예요.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거예요. 야 내가 빚진 자구나. 어떤 책임감이냐,
여러분 암에 걸린 사람이 있는데, 이 약만 먹으면 암이 낫는다. 그래서 그 약을 먹었는데 암이 나아버렸어요. 그런데 똑같은 병이 걸린 다른 암 환자가 힘들어 있는데, 그 암 환자에게는 자기가 자기만 낫고 그 암 환자에게 자기가 나은 약을 소개 안 해준다면 그게 인간성이 제대로 된 거예요? 안 된 거예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안 나눠주면 그 비인격자예요.
어떤 사람이 큰 눈 폭풍을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둘이서 같이 가다가 쓰러졌어요. 어떻게 살 길이 없어요. 완전히 그 눈 쓰러졌어요. 그런데 한 사람이 어쩌다가 좀 더 가보니까 한 50m, 70m 더 가보니까 거기에 피난처가 있어요. 피난 산에 들어가 보니까 따뜻한 불을 피울 것도 있고, 임시 먹을 것도 있고 다 있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혼자 안에 들어가 가지고 자기만 불을 쬐고, 자기만 냠냠하면 그게 인간적으로 괜찮은 인간입니까? 70m 좀 떨어져 있는 그 사람한테 빨리 가 가지고 그 사람을 끌고 와 가지고 같이 살아야죠.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가지고 완전히 그냥 메말라 갖고 죽기 직전인 사람이 다 쓰러져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다 보폭을 해가지고 좀 더 가보니까 오아시스가 있는 거예요.
시원한 물을 마셨는데 자기만 살고 목이 말라가고 죽어있는 사람을 위해 안 간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내가 빚진 자라는 것이 이런 심정이 거룩한 부채 의식이에요. 인간이 생명의 처소, 생명수를 발견했다면, 알려야 되는 것이에여.
우리가 ‘세계복음주의총회 WEA’를 한 이유가 뭐예요? 나중에 하도 뭘 모르는 사람이 하도 공격을 하고 그러니까, 제가 저 자신을 돌아보았어요. 주님이 이 일을 통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救援)받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우리가 서울 선언을 하기까지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돌파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부딪쳐서 선지적 사도성을 갖고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으면 빚진 자의 심정이 되고, 거룩한 부채의식, 거룩한 책임의식을 갖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로마서가 주는 선물이고 앞부분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감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오늘 여러분 로마서의 산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떤 어떤 분들은 산에 들어와 있지만, 너무 피곤해 갖고 지금 졸고 계시는 분도 계세요. 누워서 잠들어 있는 분들 계세요. 또는 자포자기해 가지고 넋 놓고 있는 분도 있어요. 이런 분들에게 지금 빚진 자의 심정으로 우리가 뭘 나눠줘야 돼요? 뭘 나눠줘야 합니까? 11절에,
*로마서 1:11,
11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에 신령하는 인사는 방언, 예언, 치유, 그런 인사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 사도적 권면, 선지적 사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룩한 책임만 가지고 거룩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나는 빚진 자라.
그래서 이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고, 견고하게 하기를 원하고, 이걸 통하여 바울은 그 인격이 성숙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첫 번째 신학적 고봉, 선지적 사도성, 주님의 인격과 만나 가지고 우리 모두가 다 성숙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자는 무슨 심정을 갖는다고요?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다. 다 여러분 성숙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예수 처음 믿으면 모두가 다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 성도들이 많아요. 어린아이는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가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무지막지한 어린아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만 알아달라고, 아무것도 안 합니다. 기저귀도 안 갑니다. 스스로. 생각도 없습니다. 밤새도록 울고불고 난리야 난리입니다. 어린아이는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절대 안 합니다. 할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도 못 알아보고, 할아버지도 못 알아보고, 배려심도 없고, 어린아이들 교회 안에도 수도록 합니다. 예의가 있다면 누가 손님이 오면 그래도 문 밖에까지 그리고 좀 더 높여야 할 분들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인사하고 좀 높으면 차 가는 거 앞에, 차 떠나도 뒤에서, 여러분 이게 성소의 증거예요. 애들은 지만 압니다. 지만압니다. 무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라게 되면, 초등학교 5학년만 되더라도, 거룩한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자기만 알던 어른 아이가 자기 반에 있는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수님 믿고, 인격적으로 믿고 줄 말고, 내 친구들에게 복음 전하기 시작했어요. 간절함이 생기는 거죠. 믿지 않는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온 가족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이 성숙함이 생기는 것이에요. 여러분 모두가 다 로마사의 산에 올라가 가지고 누워 있거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숙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변화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우리 온 교회 또 한국 교회 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가지고 한국 교회 다시 80년대의 부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제가 한 40년 전부터 35년, 40년 전부터 늘 얘기한 것이 있어요. 서구 교회 100년 빚진 것을 한국 교회가 100년 동안 앞으로 서구 교회 갚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교회가 세계 복음주의총회, 교회 연명 총회를 하고 이런 거 다 서구 교회 빚 갚는 것이에요.
이번 로마서의 주제를 우리가 복음에 빚진 자로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의 능력과 위험 앞에 우리가 겸손히 무릎을 꿇기만 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선제적 가능성을 가지고 다시 돌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 분 한 분에게 맞춤형으로 허락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요약
우리 모두가 다 로마서의 산에 함께 등장하는 동안에 이 말씀 한 절, 한 절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말씀이 되어야 한다. 새 창조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서, 이번 한 주간 이 로마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가운데,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동행하고, 교제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안목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의 삶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야!~~~ 이 찬송 10번, 20번, 30번 하면서,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선지적 사도성을 지닌 압도적인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남은 인생에 은혜의 비대칭성을 감사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돠어야 한다. 우리가 로마서의 산에 제대로 들어가면, 혁명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아야 하며, ’빚진 자의 심정‘을 갖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아야 하며,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인 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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