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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 ♣주일예배(주후 2025년 8월 10일)"신앙고백, 예배, 그리고 예물의 삼각형"(김지찬 목사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초빙)-사랑의 교회 ☆

by ☆ 건강이 주는 행복 ☆ 2025.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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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5년 8월 10일)
설교제목: "신앙고백, 예배, 그리고 예물의 삼각형"
(ATriangular Pattern ofFaith: Confession, Worship,and Offenrig)
성경본문 : 창세기 28:16-2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정상익 부목사님(1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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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16-22,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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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교회가 해결해야 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신앙의 세대 계승입니다. 신앙은 멸절로부터 언제나 단 한 세대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을 교회 역사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서 좀 어렵죠. 교회가 멸절된 데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의역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대가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면 한 세대만에 교회가 소멸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쇠퇴 된 다음에 기도하는 부모, 교육을 헌신 헌신적으로 잘하는 교회 교사 그리고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님들이 있으며 또 한 세대만에 교회가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 교회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조국 교회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앙의 세대 계승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세대의 신앙과 물질적 헌신이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은 물질적 헌신을 얼마나 할까요? 미국 시민들이 자손으로 쓰는 돈은 수입 대비 2%인데 미국 복음주의 성도들의 헌금은 3%이며 11조는 성도의 3에서 5%만 한다고 합니다. 통계가 굉장히 많은 걸 보여주죠. 그죠? 자선이 2%인데, 성도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3%다. 한국 교회는 조금 더 나아서 수입의 5%의 헌금을 성도님들이 하고, 30에서 40%가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서
 
30대 40대 젊은 세대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태훈 근처에 대단위 이렇게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 근처에서 목회하는 분에게 제가 직접들은 것입니다. 그 단지에 30대 가장 평균 직장은 명문대 출신의 대기업 대리인데 예배당에 출석은 하지만 헌금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벌써 10여 년 전에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19세기 말에 위대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은 돈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돈이 전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요새 젊은 세대는 어른 세대보다. 돈이 전부라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끼는 거 같아요.
 
2020년도에 들어서서 소위 말하는 영끌 세대의 선주 주자가 30대이고 빚을 내서 투자 투자하는 빚투도 20대, 30대가 가장 많이 한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사회 전체가 돈의 민감해졌는데 특별히 30대 40대가 돈에 민감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십일조 표지론자들이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탐욕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성경에 근거가 없는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11조는 구약의 율법 규정이므로 은혜 시대인 신약에서 폐지되었다. 구약의 십일조는 레인에게 드린 세금이다. 신약에는 레위인이 없으므로 십일조를 교회할 필요가 없고 자선 단체해도 된다. 뭐 이런 주장으로 성도들의 마음이 촉박해지고 있음에도 단임 목사님들은 헌금 설교를 잘하지 않습니다.
 
20223년에 한 조사에 의하면 성도님들이 단임 목사님이 헌금을 강조하면 불편하다가 64%나 나왔고, 그래서 헌금을 강조하는 목사님은 35%, 그렇지 않은 분들이 65%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헌금 설교하면 돈을 좋아하는 목사라고 하는 낙인이 찍힐 수 있을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당신은 초청 강사라 단타치고 나가려고 그러는 거냐? 그러지 마시고 초청 강사도 힘들어요. 아니 와 가지고 뭐 굳이 뭐 십일조 헌금 얘기 하면 뭐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강단에서 말씀을 통해서 십일조에 대한 논쟁이 이어 지는게 아니고 목사님들이 설교를 안 하시니까? 저 같아도 담임이면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단타치니까? 좀 나은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힘든데 저도 그런데 1년에 한 번 정도 볼게 안 되는데,, 여러분은 그렇지만 이게 십일조 논쟁이 유튜브라고 하는 SNS 같은 이런 공간에서 소위 말한 프레임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십일조는 세금이 아니고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이렇게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프레임 전장에서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그러면 오히려 코끼리를 생각하죠. 왜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먼저 코끼리를 생각해야 생각하지 않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프레임 전쟁에 가장 중요한 모터거든요. 이게 그니까? 십일조는 세금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는 세금이라는 프레임이 활성화되는 거예요. 왜냐면 프레임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단어거든요. 그래서 프레임 전쟁에서는 상대방이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피폐한다고 말해요.
 
이런 프레임 전쟁을 버리면서 성도들의 마음의 밭이 황폐화 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십일조 폐지론자들이 11조만이 아니고 삶 전체를 들어야 된다. 라고 아무리 선한 의도로 주장을 해도 듣는 사람들은 10분의 1보다. 적은 헌금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자기들이 주장처럼 십일조보다. 더 많이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면 십일조 폐지론이 점차 대세가 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헌금이 늘어나야 되는 거 아니에요. 11조만이 아니라 더 해야 된다는 거니까? 왜 줄고 있죠? 십일조 표지론자들도 안 하고 듣는 사람도 안 하고 이러니까? 줄어들고 있는 거죠. 반대로 십일조 유지론자들 역시 프레임 전쟁을 하면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 이상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표지론자든 유지론자든 둘 다. 하나님께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야 된다는 성경의 정신에 미치지 못하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프레임 전쟁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듣고 복종하는 순종의 전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성도님들과 함께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구약은 율법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야곱의 십일조는 율법 시대의 산물로 신약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거 가지고 부족하니까? 야곱이 아직도 이렇게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주파를 튕기면서 불순한 의도로 십일조 서원을 했기 때문에 야곱의 십일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이 안 된다. 모범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과연 그런지 한번 성경 말씀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필 여호와는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왜 아버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손자의 하나님으로 자기를 소개하실까요? 하나님은 개인 개인보다. 가문과 세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각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신앙을 계승하지만 동시에 각 세대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으로 불리 우기를 원하시는 분이세요. 저의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김지찬의 하나님으로 불리 우시기를 하나님 원하십니다.
 
그리고 김지찬의 하나님으로 제 자녀들과 제 손주들에게 다가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감동을 느끼게 돼요. 지난 주일 저녁에 38개월 된 손녀가 보고 싶어 가지고 화상 통화를 했습니다. 오늘 유합부 갔다. 왔어. 목사님 설교하셨어? 이러니까? 목사님이 아니고 전도사님이 하셨어. 그래. 전도사님이 뭐라고 설교하셨어? 그러니까? 얘가 쳐다보지도 않고 인형 가지고 놀면서 뭐 바벨 어쩌고 그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딸내미한테 야 걔가 뭐라고 말하냐? 그러니까? 나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바벨론에 가서 뭐 사자 굴 어쩌고 저쩌고 그러는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자 굴에 누가 들어갔는데 그러니까? 손녀가 다니엘이 들어갔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에게 잡혀 먹혔어? 이러니까? 아니야. 예수님이 지켜 주셔서 안 잡혀 먹었어. 손자녀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는 거예요.
 
아니 그것도 모르냐 이런 식인 거죠. 그래서 제가 이제 그럼 네 엄마가 사자 굴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 이러니까? 내가 구해 줄 거야. 아 단호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다시 그럼 할아버지가 사자 굴에 들어가면 어떻게 공손하게 어쭈어 보았습니다. 저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아니에요. 근데 바로 할아버지도 내가 지켜 줄 거야! 저는 이제 사자 굴 걱정을 덜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사자 굴에 돌아가면 예수님이 지켜 주시는데 데다가 손녀까지 저를 지켜 준다니 저는 하늘의 영원한 보호는 물론 지상에서 3대까지 안전을 확보한 거죠. 게다가 이제 저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얻은 거예요. 무슨 뜻이냐고요? 루터가 1519년에 결혼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실제로 자녀를 경건하게 키우는 일보다. 더 쉽게 천국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지순례 가톨릭 성들 하는 미사, 교회 건물 짓는 것보다. 자녀를 경건하게 양육하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루터 진짜 대가입니다. 손녀 얘기가 나왔으니까? 계속 자랑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화상 통화를 하는데 가자기가 뜬금없이 제게 휴대폰을 사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예 비행기 사줘. 그랬더니 내가 사 줄게, 라고 했습니다. 다. 큰 성인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이 애들도 아직까지 안 사 주는 휴대폰을 손녀가 게다가 비행기까지 사 준다니까? 엄청 행복한 거예요. 이제 저는 손녀가 다. 클 때까지 밥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아내랑 안 싸우고 건강하게 사는 것밖에 안 남았어. 이제 큰 그런 것만 이제 기다리면 돼요. 애들한테 휴대폰 받는 거 포기하고 이제 손녀에게 지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한 성도 여러분,
게다가 창세기를 보면은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야곱의 십일조로 이어지고 있거든요. 그 이유가 뭘까요? 두 걸출한 족장이 십일조를 드리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동일한 체험을 한 거 아닐까요? 한 10여년 전 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안 계셔 가지고 제가 거의 1년간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주 십일조 설교를 했습니다. 다음 주에 교회를 가니까? 뭐 장로님들이 특별히 그전과는 달리 저게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가 뭐예요? 그랬더니 목사님 지난주 설교를 듣고 우리 자녀들이 십일조 하기로 했습니다. 왜 자녀들이 십일조를 하면 집안에서 재물이 빠져나가는데 왜 행복하죠? 하나님을 만나 십일조를 하게 된 부모의 경험이 자녀에게로 이어지면서 동일한 체험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의 가정을 열망하기 때문 아니에요. 저 역시 저희 자녀들과 후손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가 한 십일조를 자녀들이 하 하면서 살기를 지금도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달 물어볼 수는 없고, 눈치 보면서 가끔 올라간 대로 제대로 하나 뭐 이런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가정과 교회의 집단 체험과 기억은 주로 3세대 안에서 유지되고 특별히 한 세대 거리에서 직접 전달되고 이게 단절이 되면은 빠르게 쇠퇴한다고 해요. 뭐 신앙만 그런게 아닙니다. 가치, 은혜, 뭐 자유 뭐 이런 개념도 마찬가지 3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거든요. 그래서 성경은 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계속 3대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럼 도대체 하나님을 만난 어떤 경험이 야곱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처럼 십일조를 하게 했을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야곱은 형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서 사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권을 빼앗은 다음에, 형의 미움을 받아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밧담아람으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한 3일을 가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는 바람에 그곳에 이제 돌을 가져다가 배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아마 야곱의 머리를 들판에서 보호할 수 있는 건 아마 돌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야곱은 돌을 베고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처음 본 것은 사다리가 땅을 향해 놓여 있는데 머리가 하늘에 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가지고 설명 좀 그런데 왜 오르락이 먼저냐? 굉장히 설명이 많은데 야곱이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누워 있는 상태에서는 이렇게 쳐다보니까? 오르락이 이제 빨리 보인 거다. 시각적 관점에서 또 그렇게 해석한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천사들이 이미 내려와서 사역을 하고 있다가 보고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거다. 계속하는 분도 계시고 지금 이제 야곱이 이렇게 여행하는 도중에 그 전에 지역을 담당하던 사자가 임무를 마치고 올라가고 다시 이제 새로운 여호와 사자가 내려오는 거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거는 물론 재미는 있지만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중요한 건 뭐냐면 이 꿈 속에 나타나는 이 모습을 보고 야곱이 어떤 반응을 보였냐,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르락 내락 하고 있었는데 자세하게 보니까? 여호와께서 서서 계셨습니다. 우리 한글 개혁 개정에는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래 가지고 사닥다리 위로 되어 있는데 뭐 NIV성경 같은 경우 보면 각 주에 야곱 곁에 섰다고 돼 있어요. 또 일부 성경은 야곱의 곁에 섰다고 영어 번역 보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뭐냐면 그를 야곱으로 보고 그다음에 위에라는 전치사를 옆에 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야곱의 옆에 서서 계신 거죠. 사닥다리가 땅을 향해 놓여 있다고 했기 때문에 저는 위에 계셨다고도 할 수 있지만 땅에 내려오셔서 야곱의 곁에 서서 계셨다. 라고 해석하는게 더 좋아요.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위에 계시는게 좋겠습니까? 내 옆에 서서 계시는게 좋겠어요? 내 옆에 서서 계시는게 좋은 거죠. 그걸 굳이 왜 위에 계셨다고 해요. 뭐 때문에 옆에 서서 계시는 게 훨씬 더 은혜 스럽지 않습니까?
 
물론 위에 계셔도 우리를 보호하시죠. 말씀으로 때로는 사자들에게 명령해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이행할 수 있지만 직접 내려오셔서 야곱의 곁에 서서 놀라운 약속으로 말씀하셨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게 어딨어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해요.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내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네 자손에게 주리니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내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우리 이 장면 이해가 안 되죠. 왜 속임 당한 에서편에 서야지, 왜 속임수 꾼 야곱의 편에 서실까요? 이게 그러나 복음입니다. 사닥다리가 땅을 향해 놓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떠나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피하는 도망자,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만들어 놓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 한복판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들어오신 거죠. 이게 복음입니다. 그 왜 야곱 속임수꾼 야곱의 편에 서실까?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그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이미 여호와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선언해요. 하나님은 이렇게 한번 선택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근거로 변화될 것을 요구하세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죠. 그 정말 놀라운 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을 깨고 난 야곱의 행동을 보면, 무조건적인 사랑에 반응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야곱이 바뀌고 있는 모습을 보거든요. 우리가 다 읽은 대로 17절에 보면,
 
*창세기 28:17,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이렇게 선언해요. 그 야곱이 돌 배개를 베고 자다가 꿈을 꾸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임을 지각해요. 이렇게 인간들이 지상에서 하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영국의 켈트 지방의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thin 플레이스’라고 말해요. ‘얇은 장소’라고 부릅니다.이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이렇게 베일 장막 같은 게 이렇게 불러져 있는데 그 베일이 얇아지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하늘과 땅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얇아지는 이곳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경험하는 곳인데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세어 나오는 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 있는 병원의 병상, 요단강을 먼저 건너간 친구나 선배의 영정 사진 앞, 실직이나 파산을 당하고 혼자 앉아 있는 텅 빈 집, 대학 입시와 취업 전쟁에서 실패하고 고개 숙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런 곳이 Thin 플레이스죠. 하늘의 문인 거죠. 이런 thin 플레이스를 경험하면, 신앙의 선배들은 그곳을 하늘의 문으로 인지하고 예배한 거예요.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러한 thin 플레이스를 경험하면서도 하늘의 문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면서 영적인 민감성이 약해졌기 때문이에요.
 
사실은 얼마 전에 몇 달 전에 저보다. 15살 먹은 장로님이 저랑 같이 신학교를 다녔는데 목회는 안 하고 그냥 장로로 이제 사시다가 15살 더 먹은 형님인데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영안실에 가서 영정 사진 앞에서 조문하고 이렇게 앉아서 이제 밥을 먹고 있는데 14살 더 먹은 이제 형님 목사님이 선교사인데, 오셔 가지고 이제 영정 사진 앞에서 이제 조문하고 제 앞에 앉았어요. 근데 갑자기 눈이 붉어지셨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김목사, 내가 영정 사진을 딱 보는 순간에 눈물이 났어. 왜요? 요단 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그 저는 살고 선배잖아요. 요단 강가에 섰는데 내 선배 건너가네. 15년 남았네. 물론 뭐 15년 더 남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15년밖에 안 남은 거 아니야? 뭐 이렇게 생각을 해요. 제 아내가 뭐 당신은 뭐 꼭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 이러는데 저는 좀 시간이 더 남아야 그동안 하나님 더 사랑하고 주님 더 사랑하고, 교회 더 헌신하고 또 하나님께 이쁜 일도 하고 가야 되는데 아쉬움이 있는 거예요. 제가 성격이 ISTJ거든요. 근데 아 안에는 ENFP라 뭐라 그러냐면 자기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자기 잘했다고 칭찬해 줄 거라는 거예요. 그 근거가 뭔데 이랬더니 당신 같이 까칠한 사람이랑 살아줬으니까? 하나님이 그거 하나만으로도 자기를 잘했다고 할 거라는데 저는 성경 아무리 뒤져봐도 어디에 까칠한 남편이랑 살아서 잘했다고 하는 대목이 없어요. ENFP니까?
 
데이터 없이 그냥 막 ISTJ는 데이터 없으면 말을 못 하거든요. 근데 ENFP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요. 근데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가능해요. 아, 저 같이 까칠한 친구랑 살았으니까? 뭐 그럴 만하죠. 그렇지 뭐 어쨌든 영정 사진 앞에 딱 서 있으면은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이렇게 거의 맞다은 듯한 그런 느낌 들지 않아요. 거기가 Thin 플레이스죠. 하늘의 문이고 하나님의 집이죠. 야곱이 이제 그 꿈을 꾸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다음에 백에 삼았던 돌에다가 기름을 붓고 구별했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 베델이라 불렀습니다. 이제 야곱이 뭐 해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면서 서원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그러면 여호와께서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 1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흥미로운 건 하나님의 약속하고요. 야곱의 조건을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해요. 하나님의 약속에서 내가 이 일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 부분은 뺐고요.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면‘ 이건 없었어. 이걸 집어넣는 거죠. 그러니까? 아마 야곱이 하나님 너와 함께 내가 있어서 내가 너를 지킬 거고, 그다음에 아버지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겠다. 요게 약속이잖아요. 거기서 이제 하나는 빼고 이제 하나를 집어넣는 거죠. 아마 먹을 떡과 입을 옷이 굉장히 필요했던 거 같아요. 왜냐면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요단을 건너 밧단아람으로 갔으니까. 그러니까? 야곱의 서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폐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야곱이 먼저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조건을 걸고 하나님과 협상해서 십일조 서원을 했다. 이렇게 주장하는데 그 사람들은 문해력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야곱이 잠에 깨어서 두려워했다고 그랬거든요. 무엇을 해요? 하나님이 죄송해요. 표현이 약간 강한 거 같아서요. 그냥 자빠져 있는데 야곱이 뭐 잘한게 아니에요. 도망자가 돼 가지고 그냥 자빠져 있는데 오셔 가지고 야, 네 누군 땅 내가 너한테 자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이 땅이 티끌까지 될 거다. 그 약속하신 다음에 야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지킬 거고,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겠다. 먼저 그러셨잖아요. 뭘 뒤를 하냐고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두려운 마음에서 하나님께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리고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세 번째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내가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한 거죠.
 
그러니까? 문해력이 없는 거예요. 문해력이 없어 가지고 기본적인 해석에 이 사라교회처럼 순장 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이거 할 텐데, 그것도 안 돼 가지고 앞에 문장이랑 하나님의 약속이랑 야곱의 조건을 비교만 해도 금방 알아요. 두려웠기 때문에 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아 뭐를 딜 합니까? 여러분 야곱이 자빠져 가지고 있는데 딜할 수 있습니까? 이게 뭐를 딜을 하냐고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의 반응을 하면서 하나님하고 지금 자기의 미래를 온몸을 던진 거죠. 하나님께, 그 야곱의 스토리를 살펴보면 야곱의 십일조 서원이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하겠다. 라고 하는 서원은 움켜 지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드리는 자로 바뀌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지 않아요. 지금은 서원이지만 지금 당장 주는 건 아니죠. 없으니까? 지금은 야곱은 태중에서 이제 형과 9개월 동안 계속 경쟁을 했을 뿐 아니라 출산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잡았어요. 그래서 형이 발뒤꿈치 잡고 나오니까? 이제 이게 잡다는 동사에서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을 만든 거잖아요. 그러니까?
 
현대인들과 똑같아요. 현대인들 전체성이 역시 움겨 잡는 자 아니에요. 현대인들은 출생 순간부터 경쟁 사업에 투입되죠. 때로 따라서 일부들은 세 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7세 의대를 목표로 학원에 보내요. 현대 부모들은 수담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그 아이들을 선행 학습과 습 경쟁에 밀어 넣죠.
 
야곱은 인간 관계, 가족 관계까지 자기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잖아요. 현대인들 역시 인맥 쌓고 효율적 인간 관리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야곱은 특별히 타락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축소판이고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게다가 특별히 현대 사회는 움켜 쥐는 삶의 방식을 장려하고 제도화하죠. 수많은 광고가 인간의 결핍을 자극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라고 끊임없이 유혹해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주기보다는 움켜잡기를 원하죠.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조차도 거져 받았으니까? 거져 주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힘든 거죠. 그러다 보니까?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께 예물을 기꺼이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 제도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젠 자발적으로 그 이상의 헌금을 해야 한다고 고상하게 주장을 하는데 실제로 십일조도 드리지 않는 이유가 뭐죠? 그럼 고상하게 주장하지 말든지,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십일조 서원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서원의 종류가 내용이 세 가지잖아요.
①첫 번째 하나님을 야곱이 베들에서 만난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받은 다음에 만약에 약속대로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한다면 첫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 뭐예요? 신앙 고백이죠. 그니까? 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제는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거고 그 나중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를 가르쳐 소개할 때 엘 베델이라 그러세요. 엘은 하나님이고 베델은 베델이잖아요. 나는 베델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리고 이제 출애굽기 가야만 비로써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정확한 그 고정 억구가 생기는 거예요. 야곱의 하나님은 창세기는 안 나옵니다. 베델의 하나님이죠.
 
그다음에
②두 번째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을 했다면 그다음에 예배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야곱이 내가 돌 배개를 배고 자는이 돌을 기름 부어 가지고 구별했는데 그러면 이 집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겠습니다. 라고 두 번째 서운을 한 거고요. 그러면 신앙 고백과 예배가 있으면 다니 아니죠. 예배하려면 예물이 있어야죠. 결혼식 하려도 결혼해도 예물 있어야죠. 생일 생일 날도 예물을 바치잖아요. 아내한테. 예물 없이 생일을 어떻게 해요? 결혼 기념일 날 예물이 없다고요? 예물 없이 하십니까? 우리 남자 성도님들?. 나는 하는데 예물 없이 기념일을 지키지 못해요. 인간 관계에서도 이렇게 예물을 가지고 물론 큰 예물은 아니지만 조그만한 뭐 이렇게 기념품 이런 거라도 이렇게 줘야 아 그래야 이게 인간관계가 제대로 불러가는 건데 하나님께 나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예물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이제 야곱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 1을 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게 신앙 고백하고 예배와 예물이 세 가지가 있어야, 그래 하나님의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그니까? 자 여러분 보세요. 성경 어디를 보아도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하는 구절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시간 가면 안 되는데 성경의 핵심이 뭐냐면 성경의 그 십일조 핵심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그의 감사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10분의 1을 드리는 것 이게 정확해요. 그런데 이제 몇 군데에서 이렇게 십일조를 내면서 복 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이 있고 십일조를 매 3년 십일조를 드리면서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하는 본문과 말라기 3장이 있어 가지고 세 군데에는 그런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큰 틀은 뭐냐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얘기하면 성경의 십일조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십일조 정신을 왜곡할 수 있어요. 그 조심하셔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주시면은 그 주신 것에서 드리는 거지, 주시지 않은 것을 드리는게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8장에서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 있는 것을 드리면 당연하죠. 구약의 십일조 똑같아요. 주신 것에서 드리는 거지. 주지 않은 것에 드린다고요. 누가 그래요? 주시지 않는 것에 드릴 수 없는 겁니다. 주신 것에서만 드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십일조 정신은 굉장히 분명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은 다음에 야곱이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하는 예배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사람으로 바뀐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과 예배와 예물이라는 삼각 관계 안에서 예물을 이해해야 되죠. 그 십일조만 따로 딱 떼내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으니까? 그럼 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 무엇을 믿고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물인 거죠. 특별히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쇼핑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여행하는 일에 마음껏 돈을 씁니다. 이런 학자들이 세속적 예배라 부르거든요. 이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의 존재와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렇게 신앙고백과 예배와 예물로 드리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면에서 십일조는 고백적 저항인 거죠.
 
저는 중학교 때 등록금을 못내 1년 휴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안 상황이 너무 안 좋아 가지고 이남2녀의 장남인 저는 중3 때 휴학하고 집에서 쉬었는데 주변에서 왜 복학하려고만 하고 왜 어머니를 안 돕냐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마대 공장을 다녔습니다. 두 달 만에 공장이 망했습니다.
 
저 쳐다보지 마시고 저 때문에 망한게 아니고 그냥 그냥 망했습니다. 그 두 달 제가 그 월급 받아 뭐 했겠습 얼마 받았니 기억이 안 납니다. 성경 한 권 사고 어머니께 고무장갑 하나 사 드리고한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하면 복받는다고 했을까요? 몇 만 원 받았겠죠? 뭐 2, 3만 원 받았을려나? 모르겠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11조 내지 않아도 하나님 뭐라 그러지 않으실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가 저는 정확히 뭔지 모릅니다. 생각이 안 납니다. 아마 당시에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내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가스 라이팅이라 그러는데 몰라요. 뭐 그분들이 가스라이팅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요. 설마 가스라이팅이라고 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며 아깝다는 생각하지 않았고요. 하나님께 대한 저의 신뢰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 목사님들께서는 어떤 동기에서인지 모르지만 19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십일조를 하라고 강하게 권면하셨죠. 그이 권면에 순정하다. 보니까? 십일조를 통해 탐욕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조금은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채우신다는 걸 믿을 수 있게 된 거죠. 가난할 때 십일조를 낸다고 더 비참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부할 때 십일조를 낸다고 덜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아니잖아요. 이전 목사님들의 십일조 강조가 성경의 진리가 실전적으로 옳다. 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에 저는 한국 교회 전통에 대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해보면 아니까,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십일조를 단순히 의무로 액수의 문제로 생각해서 안 되죠. 십일조를 생각할 때 야곱이
 
가졌던 꿈과 비전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준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됩니다. 나다나엘이에게 주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뭐하고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단순히 사닥다리만이 아니고요. 인자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예요. 하늘과 땅이 붙은 거죠. 이제는 하늘과 땅이 이렇게 얇아진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이렇게 붙어 있는 오버랩 돼 있는 거죠. 이렇게. 그리고 그리스도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하늘의 무한한 사원과 풍요가 우리에게 열렸다는 말 아닌가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열려 져 있는 하늘의 무한한 능력과 자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 큰 일을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세례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찢겼습니다. 하늘과 땅의 구이 구별이 사라진 거죠. 그리고는 4일 만에 3일 만에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 주셨고, 마가 다락방의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 각 언어대로 각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자기 지역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향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과 힘을 공급하시는 그 예수님의 더 큰 일을 경험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나와서 주일마다. 또 예배 공 예배마다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기에 십일조는 신앙 고백과 예배와 함께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에 감사하여 드는 예물이기 때문에 이게 관계의 문제고 은혜의 문제인 거죠. 그래서 십일조는 율법적 최소가 아니라 은혜의 최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10분의 1을 모든 성도들에게 강제적으로 이렇게 교회에서 이렇게 의무로 규정하지 않잖아요? 신약 시대에는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며 하나님께 감사해 드리는 자발적 최소, 은혜적 최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통 교회는 그 어디라도 예배 참석할 때 헌금을 해야 된다. 그러지 않잖아요. 예배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멤버가 되고, 교회의 직분자가 되면 그때는 헌법적 규정으로 십일조는 누구나 해야 된다가 아니라 권면 사항으로 율법적 최소가 아닌 은혜의 최소로 자발적 최소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것을 교회가 권면하고 있는 거예요.
 
이단들은 오히려 헌금 많이 안 하면 중앙 본당에 못 들어갑니다. 신천지가 거기 중앙 본다고 돈 내야 들어갑니다. 희한한 애들이 쟤네들. 정통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분량이나 혹시 형편으로 인해 십일조를 하기 어려운 마음이 든다면 억지로 해서는 안 되죠. 굳이 십일조를 단어를 쓰기 원치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일정한 부분을 드리는 훈련을 하시면 돼요.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목사님이 미국 성도들이 평균 3% 헌금을 하니까? 1%씩 올려 가지고 10%까지 올리는게 어떻겠냐, 이렇게 제안을 하고 저는 한국 교회는 5%니까? 1년에 1%씩 올려서 10%까지 가보는 훈련을 하는게 어떤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출석하는 교회에서 예배의 은혜를 받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시키고, 성도 간의 교재 유익을 경험하고 있다면 먼저 출석 교회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출석하는 지역 교회가 재정적으로 건강해져야 그 지역에서 복음 사역과 다음 세대 교육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말 돕고 싶은 어려운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로 이적해서 거기서 봉사하고 헌금을 하는게 더 적절할 것입니다.
 
출석 교회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다른 곳에 헌금하는 것을 자랑한다면 자칫 위선일 수 있죠. 그러나 10분의 1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존 신자들은 10분의 1이 목표가 아니라 더 많이 드릴 수 있는 지혜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일조 이상 할 수 있는 여력과 마음이 있다면 뭐 다른 교회나 뭐 선교 단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10분의 1은 자발적 최소고 은혜의 최소가 돼야 되는 거고, 그런 점에서 제가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 규정된 의무적인 헌금처럼 보이는 건 맞다. 대신 신약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은혜로 하나님께 하는 거라면 십일조는 자발적 최소지 이게 최대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자발적 최소로 은혜적 은혜의 최소로 이렇게 드리면 더 많아져야 되는 건데, 더 줄어드는 건 도대체 무슨 이유일지, 전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미국의 저명한 존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33년 동안 베들레헴 교회에서 십일조 설교를 두 세 번 정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헌금과 희생에 대해서 늘 이야기했지만 십일조에 관해서 그렇게 밖에 안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했던 십일조 설교 요지가 무엇입니까? 형제 자매님들이여, 왜 우리가 더 적게 하려 합니까? 였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에겐 더 좋은 언약, 더 좋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희생, 더 좋은 헌금이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우리는 바울이 마게도니아 교회를 칭찬한 걸 잊어서 안 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환난의 많은 시련과 풍성한 연보, 이거 상반되지 않아요? 아니 마게도니아 교인들로 하여금 많은 시련 가운데 풍성한 염보를 하게 한 이유가 뭘까요?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동기였대요. 아 이보다. 더 큰 역설이 어디 있어요? 근데 이게 진리예요. 성경 기독교는 무엇이든지 많이 넘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도 넘치고, 시련도 많고, 가난도 극심하게 경험해요. 그런데 이 많은 환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죠. 이게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아멘.
 
많은 환난 가운데서 극심한 가난이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말해요? 이 이 일이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 들에게 주신 은혜 때문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헌금을 교회가 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보면 무시해서 안 되는 거예요. 퍼센티지를 보면 작을지 모르지만 작은 자들의 헌신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의 헌신을 가지고 왜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헌신까지 그렇게 알겨 먹으려고 그러냐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물론 저는 목회자로, 대부분의 많은 목회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가난한 성도들이 헌금할 때 마음이 아파요. 하지 말라고 그래요. 어떤 때에는 그렇게 어려운데 왜 하냐?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가난한 자의 헌금은 박수치거나 감사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되는 정신이라는 거죠. 교회 정체성이고, 왜요?
 
여력에서 내는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과부가 드린 거 아니야. 어떻게 저들은 무엇 가진게 없는데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거기에서 도전을 받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신지를 듣는 거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헌신을 그냥 박수 치고 감사하고 이 정도나 아니면 숫자가 x가 얼마 안 되니까? 무시해서는 안 되고 교회가 배워야 할 정신이다. 이렇게 선배들은 가르쳤어요. 이런 거를 알지도 못하는 일부 진보적인 특별히 유튜브 잘잘법 이런데 나오는 사람들이 신약에는 헌금이라는 돈이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는 헌금이 없고 돈이 없고 뭐가 있냐? 가난한 자들이 주는 연보밖에 없다. 이렇게 주장해요. 고린도후서 8장 9장에 보면 돈이란 단어 안 나옵니다. 맞습니다. 화폐라는 경제적 영어 없습니다. 대신 은혜가 8장에만 일곱 번. 디아코니아 성도를 섬기는 일로 두 번, 8장 9장에 함께 참여하고 교재한다는 코인이니어가 두 번, 하나 가난한 자에게 주는 헌금을 사랑이라고 아가페로 세 번, 후하다는 단어가 한 번 풍 넉넉함 넉넉함이라는 단어가 두 번, 거에게 연보라고 두 세 번, 연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율로 한데 축복이란 단어거든요. 한 번, 착한 일이라고 한 번, 봉사라는 단어로 한 번 쓰였습니다.
 
이제 바울이 하려고 하는 일은 신약교회 성도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이 예물은 그냥 돈 화폐가 아닌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은혜, 사랑, 풍성함이라고 하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썼는데 개뿔도 모르면서, 헌금 돈이란 단어 안 나오니까? 신약에는 헌금이 없다. 그 제 정신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최근에 이렇게 우연히 유튜브를 이렇게 보니까? 리아킴이라고 하는 자매가 한 10년 전에 위대한 약속, 뭐 이런 노래를 불렀는데 갑자기 듣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가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네.‘ 구약도 모르면서 신약을 알려고 하다가 구약도 신약도 다. 떠나가는 거야. 이 알지도 못하면서. 그니까? 구약은 십일조라고 하는 율법적 최소를 정해 놓고 그것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운영했는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돈 화폐라고 하는 재정적 경제적 용어로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니까 보지 마세요. 유튜브, 교회도 모르고 죄송해요. 너무 심하긴 한데 그냥 제가 그 강의를 듣고 있으면 아 교회를 모르는구나 은혜를 모르는구나 구약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약을 알려고 할까? 그런 생각이 확 들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 시대 운운하면서 십일조 페이지 어쩌고 저쩌고 이러는 사람들은 아직 율법의 수준에 율법의 사람이 지나지 않는 거죠. 극심한 환난 가운데 극심한 가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예물을 드렸던 마게도니아 교회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1도 모르는 거죠.
 
우리 사랑하는 사랑교회 성도 여러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선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믿음의 세대 기승이 일어나는 가정을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의 주로 고백하고 그분에게 예배드린 일에 목숨을 걸며 십일조와 감사 헌금으로 예물을 드리는 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면 교회는 한 세대만에 쇠퇴하고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은혜의 최소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삶 삶을 다음 세대에 강력하게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십일조가 아버지의 십일조를 거쳐서 손자의 십일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이를 넘어서서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한다면 결국은 십일조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하나님의 바다에 얕은 물가에서 발로 이렇게 물장구치는 수준으로는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설교 후에 함께 부를 찬양 찬송가 302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이 조려서 못 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띠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내 맘껏 저가라. ♪~~ 언덕을 떠나 창파에 배를 띄우고 하나님께서 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산다고 한다면 은혜의 바다에 깊은 속까지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에게 주신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3대가 하나 되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예배하며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세대 계승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간구하자. 야곱이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하는 예배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사람으로 바뀐 거처럼, 우리도 항상 신앙고백과 예배와 예물을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가 되고, 자녀를 경건하게 양육하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임을 깊이 깨달아 세대 계승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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