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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훈련-사역훈련 -주일예배-독후감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31일)"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천동원 부목사님)-사랑의교회 ☆

by ☆ 향기야(hyacool) ☆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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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31일)

제목: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마가복음 5:21-43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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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시련은 내가 믿고 의지 했던 이로부터 당하게 되는 배신이다. 배신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사에서 배신감을 느낀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정서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될 때 일상용어로 종종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배신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바로 하나님께 느끼는 배신감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랐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내 삶에 축복의 기회를 주시리라 기대하고 또 하나님 앞에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복은 고사하고 삶에 고난이 많다. 믿음으로 시작했던 일들이 그것도 주님에 확실한 응답이라는 확신 속에서 진행했던 일들이 정작 정반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 응답은 고사하고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여러분, 그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더 이상 귓전에 들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밖에 남아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실망과 낙심이 너무 커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회당 장 야이로는 마치 이 같은 처지에 놓인 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딸이 죽을 위기를 맞이하자 한 걸음에 주님께 달려와 엎드려 간절히 간구한다. 회당 장 야이로에게 발견되는 단면을 살펴보면, 예수님만이 딸 아이를 살리실 유일한 분이심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간구한다. 여러분 이 당시 발아래 엎드리는 행위는 두 부류의 계층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신하가 왕 앞에 행하는 충성의 표시로서의 동작이 바로 발 앞에 엎드리는 행위였다. 또는 종이 주인 앞에 행하는 복종의 태도가 바로 이 같은 행위였다는 것이다. 바로 당시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해당 예배를 주관하고 또 회당의 사람들을 감독하여 회당 건물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또한 예배 시에 구약을 낭독하고 설교할 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지도자였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 회를 살펴보면 회당중심으로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회당장의 허락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 회당 장은 유대 사회 내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 회당 장 야이로가 수많은 무리들이 지켜보는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마치 신하가 왕 앞에 행하듯 마치 종이 주인을 맞이하는 예수님 발 앞에 납작이 엎드려 간구하고 있다. 자신이 지닌 사회적 지위와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절박한 부성애 때문이었다. 적어도 회당 장 야이로는 예수님이만이 내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에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이다. 그는 간절하고 구체적으로 고한다. 본문 22절, 23절은 다음과 같이 고한다.
 
*마가복음 5:21-23,
22 회당 장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딸의 몸에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 간구한다. 즉 그의 간구는 막연하지 않았다. 매우 구체적으로 간구했다. 이에 본문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5:24,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우리 주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신다.” 여러분 무슨 말인가? 회당 장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구체적인 간구대로 친히 찾아가서 그 딸의 몸에 손을 얹어 살게 하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인 것이다. 다시 종료하면 회당 장 야이로는 주님만이 죽어가는 딸을 살리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간절히 간구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께 응답에 대한 분명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 할 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 이와 방불한 세 가지 내용이 언급 된다 첫 째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분이시다.
 
둘째는 기도는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응답도 구체적이다.
셋째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면 반드시 응답된다. 여러분 야이로의 행보를 살펴보면 야이로는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 응답에 대한 가르침의 정석대로 행했다. 그러나 회당 장 야이로가 직면한 엄연한 현실은 딸의 죽음이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구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현실은 딸아이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만이 응답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구주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믿고 따랐는데 정반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이 같은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주님께 배신감을 느낀다는 표현 외엔 달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혹여 야이로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성도님들이 계시거나 내게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우리 성도님들께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본문의 말씀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면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회당 장 야이로의 열두 살(12세) 난 딸과 열 두해(12년) 혈루 증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마치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한 내용이다. 회당 장 딸 아이 나이가 열두 살이라는 것과 여인이 혈류 증을 12년을 앓았다는 이 숫자적인 동일성 외에는 그 어떤 닮은꼴을 발견할 수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12란 숫자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회당 장 딸 아이에게 12라는 시간은 ‘생과 사’를 오가고 있는 딸아이의 입장에서는 꽃다운 시간이었고 인생의 정점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반면 혈류 증을 앓은 여인에게 12년이라는 세월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외로움 속에 가산을 다 허비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병은 완화되지 않았다. 혈류 병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이요 죄 대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여인이 겪었을 12년이라는 세월은 지옥의 시간이요, 고통의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사건은 그 어떤 닮은꼴을 발견할 수 없는 별개의 사건으로 비춰진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흔적을 살펴보면 각 사건마다 개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한 시간의 흐름의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적어도 야이로 사건에서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문은 혈류 증 앓은 여인의 사건이 마치 회당 장 야이로 사건에 종속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예수님께서 회당 장 야이로의 간증을 듣고 그의 집으로 이동 할 때, 큰 무리가 에워싸며 뒤를 뒤따르게 된다. 그때 열 두해 혈루 증 않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이 생각하기를 ‘그 예수님에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을 하고 무리들 틈을 비집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다. 그 순간 그녀의 혈루 병의 근원이 깨끗하게 치유하게 되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27절에 이 같이 말씀한다.
 
*마가복음 5:27-29,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12년 동안이나 고통당했던 혈루 병이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그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가며 자신의 모든 가산을 허비하기까지 백방으로 뛰었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었을 뿐이었는데 그녀의 혈루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 주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 가운에 돌이켜 말씀하신다. 30절 말씀이다. 무리가 에워싼 과정 속에 이상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의 말에 게의 치 않으시고 또다시 찾으신다. 그제 서야 이 여인이 이실직고를 한다.
 
*마가복음 5:30,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있는 데 발생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주님은 제자들 말에 게의 치 않으시고 또 다시 주위를 살펴보신다. 그제 서야 이 여인이 이실직고를 하는데 33절에 보면,
 
*마가복음 5:33,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경을 지켜본 회당 장 야이로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단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12년간 앓았던 그 혈루 병이 그 깨끗이 치유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예수님이 우리 사랑하는 딸의 몸에 손을 댄다면, 이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리라.”는 기대가 당연지사인 아닌가? 회당 장 야이로는 혈루 증 여인이 치유되는 이 기적의 광경을 자신의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그 기적의 광경을 지켜보았을 때 ‘내 딸도 저 여인처럼 깨끗하게 치료되겠다.’는 믿음의 확신이 용솟을 쳤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회당 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비운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데,
*마가복음 5: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여러분, 회당 장 야이로가 주께 엎드려 간곡히 구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나 딸아이의 죽음이었다.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청했는데 결과적으로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어떤 상황인가?
 
*마가복음 5: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여러분, 회당 장 야이로가 주께 엎드려 간곡히 구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나 딸아이의 죽음이었다.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청했는데 결과적으로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어떤 상황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말씀은 12년간 혈루 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치료를 받아 우리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이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축복하신다. 회당 장 야이로는 기적적인 치유를 눈앞에서 목격하며 자신의 딸도 그 여인처럼 깨끗하게 치료될 것이라는 그 부푼 소망을 품은 바로 그때에 딸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와 방불한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주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기도응답의 체경험담을 접하게 된다. 특히 특새라든지, 또 특별한 집회 때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행하셨던 그 간증을 듣게 되면, 부푼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동일한 응답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고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야이로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 때문에 절망 속에서 소망을 붙잡았건만, 되려 예수님 때문에 그 소망이 다시 절망으로 급변하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면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께 찾아가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내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주실 것이라 소망한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혼란스러운 순간순간이 많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 배신감을 느낀다. 문제는 이 같은 일들이 신앙생활을 탓하게 되고 미숙한 신자들만이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믿고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섬김이 뛰어난 이들에게도 이 같은 일들이 종종 목격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그 같은 사례가 많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 그는 나이 40이 되자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할 생각으로 백성들의 편에 섰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애굽의 군사를 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오히려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또 살인자라는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하게 된다. 그러면 40년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시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얼마나 실족했었는지, 자기 눈앞에,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그 불이 나무를 태우는 그 신비로운 광경 앞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극구 사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실족함 때문이었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기적을 통해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처단하고 또한 3년 6개월 만에 지속되었던 가뭄을 종식시켰던 비의 기적을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 뜻대로 하나님의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자기가 원했던 그림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시니 그만 실족하여 로뎀 나무 곁에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여,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도 예수님께 실족하게 되니, 그 입으로 예수님을 증언했던 자가 도리어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참으로 고대하던 메시아가 되는지’ 질문해야 할 만큼 그는 예수님 앞에 실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말할 나위도 없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실족하여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뿔뿔이 흩어져 삼 년 육 개월 동안 수고했던, 3년의 그 공생의 시간이 무색하게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이전 생업의 길로 돌아서는 민낯의 실족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 세례요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믿음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족한 이들이었음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에게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느끼게 되는 실망감, 혹은 배신감은 신앙의 성숙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며 어쩌면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예외일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혹여 하나님께 실족하여 스스로를 자책하고 계시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소망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우리 주님은 마치 간절한 기도가 거들 되어 실족한 야이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본문 36절 말씀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딸의 죽음 소식에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있을 이 야이로에게 우리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신다. 여러분 36절에서 ‘곁에서 들으시고’ 라는 이 헬라 원문을 번역하면 ‘들어 넘기다. 무시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즉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의 죽음 소식을 가져온 이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던 이 비운의 소식과 함께 야이로에게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말라며 정답 같은 충고를 한다. 딸은 이미 죽었고 이제 예수님도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가지고 온 이 비보는 사실에 기초한 정확한 소식으로 마치 정답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보라. 우리 주님은 정답이 아니라 그분의 해답을 제시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해답이었다.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신다.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기만 하라. 의 헬라 원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재형으로 흔들리지 말고 네가 처음 내게 가졌던 믿음을 지금도 그대로 굳게 간직하라는 의미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보와는 달리 우리 주님은 회당장의 딸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지 않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아직 끝이라고 선언하지 아니하는 한 끝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분명한 이유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 같은 일들이 얼마나 자주 재현되는지 모른다. 주신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주위에서 사실을 보고하며 정답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두려움 가운데 사로잡히는지 모른다. ------
 
결국 이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약화 시키고 믿음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직 저와 여러분은 두려움을 조성하고 믿음의 근간을 뒤 흔드는 세상의 정답 같은 소리가 아니요, 오직 주님이 주시는 해답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신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이 있기를 바란다. 본문에서 딸의 죽음 소식 앞에서도 야이로가 절규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쨌든 야이로는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들었던 것 같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야이로는 주님이 주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권면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믿음의 근간을 뒤 흔드는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본문 38절이다.
 
*마가복음 5:38,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소식으로만 들었던 비보를 이제 직접 야이로가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사람들이 심히 통곡하는 이 광경 앞에서 딸이 죽었다는 이 죽음의 실체를 야이로가 직접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딸이 죽지 않도록 결박하게 간구했지만 결과는 딸의 죽음이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붙잡고 힘겹게 그 자리에 나아왔지만 결국 야이로가 맞이하게 된 현실은 부인할 수 없은 엄연한 딸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순간의 우리 주님은 회당 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5:39,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때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4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40a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여러분,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시며 희망과 소망을 주시는 반면에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일제히 비웃는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낙심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약속 있는 말씀을 비웃음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낙심케 한다. 여러분, 낙심은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능숙한 마귀는 바로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너의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어”, 낙심을 조장하는 일이다. 낙심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백성과의 창조된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는 별게이다. 이것은 불행의 문제이다. 기억하기를 바란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간섭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은 낙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 땅을 살아내는 성도를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낙심하는 순간,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불행해진다. 마치 삶이 지옥 같아진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 성도들에게 낙심을 경계하도록 당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의한 재판관 비유는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끈질긴 이 간청함으로 인하여 결국 그 원한을 들어주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들의 그 원한을 갚아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8장 8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말씀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낙심 때문에 믿음을 저버린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여러분, 낙심은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임을 기억하고 혹여 낙심 속에 거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야고보서 4:7절의 권면처럼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의 말씀처럼 담대히 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본문
 
*마가복음 5:40-42,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절망의 임계점에서 주님은 소녀를 향해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신다.
“소녀야, 일어나라 명령하신다.” 그때 죽었던 소녀가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그 순간, 야이로를 괴롭혔던 모든 불신과 그 낙심의 그림자가 일제히 물러가게 된다. 죽은 자를 일으키신 전능자, 하나님은 전능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밝히 그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달리다굼의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하기를 바란다.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고난에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의 끝에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면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나타남을 믿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달리다굼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자는 본문에 의하며 야이로 부부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불신을 조장하고 비웃음으로 낙심케 하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신다. 본문 4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가복음 5:40-42,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사.
-결국 끝까지 주님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달리다굼’의 음성과 지적을 보여주셨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당 자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 과정 속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예수님도 이제 소용없다’는 그 불신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야이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 음성 앞에 야이로는 결단코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의 그 실체를 이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야이로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면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껴도 믿었던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해 낙심이 찾아와도 결단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야이로는 ‘달리다굼’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결국 야이로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낙심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여러분 믿기를 바란다.
 
여러분 신앙의 큰 위기는 당장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응답으로 인해, 그 낙심으로 인해, 주님 곁을 떠나는 일이다.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된다. 낙심으로 인해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그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음성을 더 이상 못 듣게 되니 세상의 소리,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도 소용없다.” 그 불신과 비웃음 앞에 억장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위에라도 설령 이제는 끝이라고 하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결단코 주님 곁을 떠나지 말기를 바란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그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게 된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곁에 있으면 반드시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서 때가 되면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야이로는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는 그 어떤 경우라도 설령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결단코 주님 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달리다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뿐 더러 달리다굼의 기적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소개 된 나오미의 두 자부, 룻과 오르바를 보라. 그들은 이방 모압 여인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었을 때, 나오미는 두 자부, 룻과 오르바에게 그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 때 두 자부 모두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오미가 계속해서 권하니 결국 오르바는 자신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하며 그 곁을 결단코 떠나지 않았다. 그 결과 룻은 보아스를 만나 기업을 얻게 되고 훗날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계보를 잇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덧입게 된다. 그 어머니 나오니 곁에 함께 하느냐, 떠나느냐, 룻과 오르바, 이 두 사람의 행보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라도, 룻처럼, 회당 장 야이로처럼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에 해답을 제시하실 것이요, 궁극적으로 달리다굼의 기적으로 우리 인생을 성대하게 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신대원(신학대학원) 시절로 기억하는데, 참 가진 것이 없고 어쩌면 미래가 기약할 수 없는 참 암울한 한 시간에 선상에 섰던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름 주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했던 기도제목이 있었다. 그런데 정반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제마음의 당혹감 때문에 어찌할 줄 몰랐다. 제 마음속에 드는 마음은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신대원 안에 ‘소래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3일 금식하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가 없는 시간은 그 시간에 소래교회에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너무 사람이 힘이 들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 알지 않는가?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그 예배당의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한 마디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너무 힘이 드니까 그냥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던 강의가 없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 시간을 지키는데 3일 금식이 끝나는 가운데 주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송을 떠올려 주셨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 되는 것” 사실 그 기도를 드릴 때, 제 마음은 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신앙인이라, 차마 죽고 싶다는 표현은 못하더라도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이 찬양을 주시는데 제 마음에 “하나님, 어이하면 내 인생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저에게 살 의지를 주셨다. 그 이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 더 좋은 것으로 선대하셨던 마치 달리다굼의 기적, 이제는 끝이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내 삶 가운데 기적 같은 삶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에 등장하는 야이로를 보면,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 외에 야이로는 주님 앞에 어떤 간구를 드렸다는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는 생각하건데, 아마 야이로는 더 이상 기도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죽었다는 비보 앞에, 그 죽음의 실체를 목격한 이 상황 앞에, 무엇을 기도하겠는가? 그냥 주님 앞에 곁에 매달린 것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끙끙 앓았던 그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마치 구하지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해 주셨다는 그 고백처럼, 야이로에게 동일한 달리다굼의 기적을 허락해 주신 줄 믿는다. 말씀을 맺겠다. 우리 신앙 성숙에 여부와 상관없이 마치 기도가 거절 당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되면 누구나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끼고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게 된다. 그리고 또 믿음으로 구하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정반의 시간으로 흘러갈 때, 그 낙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처럼 절망 속에도 낙심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된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실 것이다. 달리다굼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표현을 용서하세요. “좋은 말 할 때, 주님께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심정으로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나와 주님과 함께 하시길 바란다. 낙심이 되어 한 마디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의식적으로 성경 말씀을 펼치고 내 곁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곁에 붙어있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우리 주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길이심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달리다굼의 기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시길 축복한다.
 
♣요약
우리가 주님 앞에 믿고 구했던 간절한 기도가 때로는 거절당하고 더 이상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낙심의 때를 맞이해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 곁에 머무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 인생 가운데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달리다굼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며 세상이 원하는 정답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해답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서 세상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 주님 곁을 지켜서 달리다굼의 기적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의 앞서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며 9월 26일 섬김을 위해 더욱 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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